사랑은 적극적인 삶의 표현이다: 고린도전서 다시 읽기

최경환
2018-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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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적극적인 삶의 표현이다
: 고린도전서 다시 읽기
글_ 한수현


철학과 처세술의 고린도

주전 146년 로마는 그리스와 아케아 지방에 전쟁을 선포한다. 팽창되어가는 로마의 세력에 반기를 든 고린도를 비롯한 그리스 지역의 도시국가들을 멸망시키기로 로마는 마음먹는다. 옛 그리스 도시 중에서 아테네나 스파르타에 비해 고린도는 그리 인상깊은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고린도시의 사람들은 로마와 끝까지 싸우기로 마음먹었던 사람들중 하나였다. 로마는 그러한 고린도의 야성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모든 그리스 도시 국가들에게 본보기로 보이기 위해 고린도를 철저하게 파괴하였다. 

로마의 군단들은 고대 그리스의 융성한 도시였던 고린도를 완전히 파괴하였다. 살아남은 고린도의 성인 남자들 약 육천명이 모두 십자가에 매달렸다. 십자가의 행렬은 고린도시로 향하는 대로 위에 일렬로 세워졌다. 로마는 그 시체들을 위해 어떤 무덤도 허락하지 않았다. 숨이 끊어지고 시체가 흔적도 없이 사라질때까지 십자가의 시체들은 내려지지 않았다. 여자와 아이들은 노예로 팔려 뿔뿔히 흩어졌다. 이 흔적도 거의 남지 않은 옛 고린도시의 자리에 그로부터 백년정도 지나 로마는 식민도시를 세운다. 

당시 로마는 거대한 전투국가였으며 로마의 대부분의 건장한 평민 남자들은 군복무를 하였는데, 20년에 달하는 길고긴 군복무를 마치고 다시금 새로운 생활을 할 터전이 필요했다. 로마시는 이미 인구밀도가 극에 달해 있었으므로 매년 제대하는 로마 군인들의 생활을 약속해주는 도시가 필요했다. 

고린도는 퇴역한 로마 병사들을 위해 세워진 식민도시였다. 물론 당시에 로마가 도시를 세우면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상업과 교육의 중심지가 되도록 각종 도서관과 학교, 목욕탕과 상수도 시설을 완비한 로마의 도시는 인기가 높았다. 그러나 고린도는 불과 두세대 이전에 로마의 극악한 폭력성을 경험한 도시였고, 그 도시의 사람들은 로마제국의 폭력에 대한 공포를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옛 그리스 도시인 고린도가 아닌 로마의 식민도시 고린도는 다문화, 다민족, 다종교라는 제국의 도시의 전형을 보여주는 곳이었다. 사람들의 삶은 자유분방했었다고 한다. 당시의 보수적 견해로는 그러한 문화가 질서없는 그래서 교양이 없는 것으로 보여졌을 것이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고린도의 삶을 매우 ‘문란한’ 삶이라고 기록했다. 

그러한 도시에는 여러 철학과 삶의 처세술들이 활발히 유통되었다. 마치 대형서점에 들어서면 제일 먼제 눈에 띄는 책들이 ‘이렇게 하면 돈을 번다..’ 등등과 같이 고린도에서는 여러 철학과 삶의 방법들이 활발히 나누어지는 곳이었다. 철저한 금욕주의부터 자유롭고 문란한 삶의 아름다움까지 찬양되는 곳이었다. 바울은 그러한 로마(이방) 도시에 교회를 세웠고 고린도전서는 그들에게 보낸 바울의 편지이다.



메시아 공동체의 내전

고린도전후서는 다른 바울의 서신들과는 매우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는데, 한마디로 정리하면 매우 ‘정치적’ 위기 상황에 대한 바울의 응답이라고 할 수 있다. 고린도교회에 문제가 생겼는데 이미 매우 ‘정치적’ 위기를 만들어 내었다. 메시아 공동체, 즉 교회를 만드는 것에 생애를 바친 바울에게 이는 참으로 뼈아픈 일이지 필생의 정력을 다해 해결해야하는 문제였다. 고린도 교회의 정치적 위기는 바로 내전(Civil War)이다. 

지금 우리는 일상적으로 교회에 분파가 생기고 싸우고 나누어지고 서로를 비방하고 미워하는 것을 보고 있지만 선교를 위해 흩어지는 공동체가 아니라 서로에 대한 증오와 비방으로 가득한 공동체는 바울이 보기는 메시아 공동체(교회)라고 볼 수 없다. 우리는 내전의 비참함을 무엇보다 잘 알고 있다. 한국전쟁이후로 한국 사회는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비정상적인 사회가 되었다. 몇 세대를 더 지나야 내전, 즉 같은 민족끼리 총과 칼로 죽이고 죽은 아픔을 치유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교회 안에 내전이 벌어지면 그 교회의 구성원들에게 크나큰 상처를 안긴다. 다시는 치유될 수 없는 상처가 남게 된다.

고린도교회는 네개의 분파(바울파, 그리스도파, 베드로파, 아볼로파)로 나누어져 있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상황을 글로에라는 사람이 이끄는 교회로부터 알게 되었다(1:11). 이에 대해 바울은 역사상 그 누구도 상상하기 힘든 방식으로 고린도교회의 혼란과 내전을 해결해 보려 하였다. 바로 그리스도의 복음의 핵심에서 나오는 방식이다. 바울은 자신의 파당이 패배하는 것으로부터 혼란을 해결한다.

‘내가 여러분을 위해 십자가에 달리기라도 했는가? 또는, 여러분이 바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는가?’(1:12) 

내가 틀렸음을 주장하는 방식이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인간 사회의 정치가 움직이는 방향을 거슬러 거꾸로 올라간다. 정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정치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통해 해법을 찾아낸다. 바로 권력을 만들기를 거부함으로써 다시금 교회나 사회를 세우는 방법을 말한다. 바울은 자신은 지도가가 아니며 정복자를 전하는 사람도 아니라고 한다. 메시아는 정복자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정복자에 의해 벗겨지고 죽고 버려진 자이다. 그의 어리석음과 연약함을 전달하는 것이 바로 복음이며 그것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동체가 바로 교회이다.

지혜(1:19)는 인간이 세계를 설명하는 방식이며, 사회 질서를 확립하는 방편이다. 그리스의 지혜를 통해 그리스-헬라 세계가 구성되고 그 지혜의 질서로 인간 사회를 재편한 것이 바로 로마제국이다. 이 지혜가 무력해지는곳, 이 지혜가 자신의 모순을 드러내는 장소가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그러기에 바울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은 지혜와 철학의 반대가 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지혜와 철학을 바탕으로 사회가 권력에 의해 재구성될때 그것에 정면으로 반하여 세상의 정치를 부끄럽게 한다. 그리고 그 찬란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기적이나 지혜를 통해 임하는 것이 아니라 (1:22-24) 오로지 하나님의 능력으로 어리석어 보이는 하나님의 약함(1:24-25)으로 임한다.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진 이들의 삶의 방식

바울이 보기에 로마제국이 지배하는 세상은 죽음이 뒤덮고 있는 장소이다. 인간은 언제나 자신의 이기심과 권력을 위해 세계를 재편하고 죽음을 무기로 사회를 지배한다. 바울은 그러한 죽음의 권력을 타도하는 것에 관심이 없다. 이미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해 열려진 하나님의 은혜 대로 살아가는 것에 있다. 새로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다. 이러한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은 미련한 것들을 택하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한다(1:27-28). 

당시의 그리스 철학의 주된 관심은 실체에 대한 물음이었다. 실체(Substance)란 세계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으로써 변화하거나 순간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에 대한 추구였다. 바울의 관심은 이런 실체적 본질주의가 아니다. 변해 가는 것들 속에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드러내는 삶이다. 철학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이 더욱 중요하다. 

당시의 사람들은 십자가라고 하면 우리가 목에 걸고 다니는 보석을 떠올리지 않는다. 바로 백년 전에 고린도를 뒤덮었던 죽음의 냄새를 떠올린다(2:1–5). 메시아적 공동체인 교회는 누가 옳고 그름에 대한 논쟁이나 정파적 싸움의 장소가 아니다. 바울에게 육이라는 것은 뼈나 살이 아니라 육적인 약함을 가리기 위해 인간이 내세우는 여타의 권력이나 가치를 뜻한다. 

하나님의 방법은 육체의 약함을 깨닫고 자신의 방식으로 강함을 구성하는데에 있지 않다. 바로 그 약함의 심연까지 내려감에 있다. 스스로를 중요하지 않게 여기고 스스로를 타인에게 열어서 타인을 받아들이고 환영하는 것.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진 이들이 사는 삶의 방식이다.


사랑으로 세워지는 공동체

그러므로 고린도전서의 핵심은 12–13장으로 이어지는 사랑으로 세워지는 공동체에 있다. 여기서 사랑은 느낌이나 감정이 아니라 타인에 대한 적극적인 행동이다. 그러한 사랑의 삶을 가로막는 것이 바로 이른바 그리스도들을 교만하게 하는 성령의 은사이다. 

12장에서 바울은 성령의 은사에 관해 길게 논하지만 그 핵심은 고린도전서를 관통하고 있는 약함의 십자가 신학이다. 12장의 후반부는 성령의 은사는 바로 메시아적 공동체를 바로 세우고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내는 사랑을 증진시키는 것임을 논증하기 위한 몸의 비유로 구성된다.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는 많지만 그들이 모두 한 몸이듯이..”로 시작하는 몸에 대한 바울의 묘사는 결국에는 아무리 서로 자신이 우월한 몸의 부분(눈, 입, 귀등)이라 주장하더라도 결국 어느 것보다 더 중요한 부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결국 서로 다를 뿐 어떤 높고 낮음도 없다. 그것들을 하나로 묶어 그리스도의 공동체로 만드는 것을 하는 존재가 바로 성령이다. 그것을 알게 되는 과정이 바로 신령한 은사들을 받고 그 은사를 따라 살아감으로 이루어진다. 가장 최고의 은사가 바로 사랑이라고 한다면 결국 사랑을 통해 하나된 공동체가 바로 진정한 교회가 된다.


교회가 잊어버린 복음의 핵심

이러한 바울의 논리는 일견 당연한 듯 보이지만 현대의 교회들이 잊어버리고 있는 중요한 복음의 핵심을 일깨운다. 바로 사랑이라는 것은 어떤 하나님에 대한 신비한 느낌이나 감정적 체험이 아니라 적극적인 삶의 표현이다. 또한 은사나 기적처럼 보이는 현상들은 그리스도인의 눈으로 보았을 때 어떤 하등의 하나님의 권위를 드러내는 방편이 아니라 좀 더 높은 신앙의 단계에 이르기 위한 과정 중에 체험할 지도 모를 사건에 지나지 않는다. 

만약에 이러한 은사로 인해 누군가가 종교적인 권위를 자랑하게 되면 성령이 머무는 공동체가 되지 못한다. 그것은 사랑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사랑하는 지혜와 권력을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의 놀라운 점은 당시의 교회를 하나의 종교적 공동체를 유지하는 관점에서 이루어 간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의 복음을 간직할 수 있는 집단을 만들 것이냐의 문제로 인식한 것에 있다. 바로 복음을 하나의 신학적인 설명이나 논문으로 간직하려 한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하나의 삶의 표현으로 만들고자 한 바울의 노력을 고린도전서를 통해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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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뜨려야 할 성전, 세워야 할 교회: 고린도전서 다시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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