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가히 한국 개신교 수난시대다. 작금의 한국사회에서 개신교는 동네 북 신세만도 못하다. 하루가 멀다 하고 터지는 온갖 추문에 사람들은 질릴 대로 질려버렸다. 한국 개신교는 반지성과 광신의 상징이자, 혐오와 차별의 대명사처럼 여겨진다. 또한 한국사회에서 가장 완고한 이해집단이자, 마치 지리산 청학동 마을처럼 세상과 담을 쌓고 자신들만의 봉건적 방식으로 살아가는 게토와 같다. 120년 전 이 땅에 개신교가 처음 전래될 때만 해도 신학문과 신문명의 심부름꾼이자 인권과 자유의 기수로서 민족과 나라의 소망의 등불로 간주되었던 한국 개신교가 어쩌다가 이렇게까지 추락했을까. 분명한 것은 오늘 한국 개신교의 이런 치부와 참화의 중심에는 “목사들”이 자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목사의 자질, 처신, 역할에 대한 회의와 반감이 개신교 추락의 일등공신이다.
이 책은 이런 문제의식을 갖고 쓰였다. 제목이 상징하듯이 무슨 거창하고 대단한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 아니다. 기실 성서 자체는 목사의 기준을 상당히 높게 제시한다. 목사는 하나님 나라 구원의 지상적 에이전트로서 경건한 영성과 탁월한 신학적 성찰 및 고결한 윤리의식으로 무장되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에서 그런 담론은 너무 아득하고 벅차다. 따라서 이 책은 현실에서 꼭 필요한 이야기를 건넨다. 한국 개신교 목회 현장 일반에서 언제든 자연스럽게 맞닥뜨리며 우리 모두를 아프게 하고 절망케 하는 문제들과 정면으로 맞선다. 그렇지만 한국교회를 전지적 시선에서 일방적으로 비난하기보다는 “긍휼한 마음으로 껴안으며” 대화를 시도한다. 그러면서도 궁극적으로 목사다움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자고 제안한다. 짧지만 경박하지 않고, 묵직하지만 현학적이지 않은 글들을 모았다. 비단 목회자뿐 아니라 동시대 한국교회의 고민과 아픔을 공유한 일반 신자들도 함께 고민할 수 있는 주제가 가득하다.
지은이 _ 김요한
과거에는 건강한 교회를 일구는 것을 소명으로 알고 목회에 전념했으며, 현재는 새물결플러스와 새물결아카데미 대표로 섬기면서 출판과 아카데미 운동을 통해 건전한 지성을 보급하는 것을 소소한 보람으로 여기며 살고 있다. 미래에는 세상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소박한 영성가로 살아가는 것이 꿈이다.
차례
제1부 목사와 학문
복음의 대사 | 교회-하나님 나라의 대사관 | 그대의 이름은 인간이어라 | 세상을 포월함 | 동종교배를 조심하라 | 성서를 사랑하는 사람 | 근심하며 절망하는 말씀의 확성기 | 설교 표절의 덫 | 설교 마케팅 | 설교 시 주의할 예화들 | 말씀뽑기의 폐해 | 평생 학습 | 신학 공부 | 인문-사회학 공부 | 과학 공부 | 기초의학 지식 | 글쓰기 훈련
제2부 목사와 영성
목회 성공의 기준 |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길 | 욕망 관리 | 삶에 밑줄 긋기 | 십자가에 못 박힌 삶 | 순종의 훈련 | 삶의 길을 걷는 자 | 교회의 중심은 어디인가? | 고난이란 이름의 스승 | 비교 의식이란 이름의 독약 | 사람에게 아쉬운 소리하지 말아야 | 신자는 하나님의 것이다 | 감정노동 | 기도 생활 | 성령 은사 문제 | 치유의 중요성
제3부 목사와 윤리
지금 사랑하고 있는가? | 창작의 고통에 시달리는 이야기꾼 | 중립은 없다 | 시민종교라는 우상 | 도시의 영성 | 축귀 사역 | 이중 언어 구사 능력 | 증언의 사명 | 역사의식 | 젠더 감수성/양성 평등 | 가족 구조의 다양성 & 고독사 | 이성과의 식사 | 장례예식의 합리적 개선을 위하여 | 해외여행 유감 | 자녀 유학 문제 | 목회 활동비 & 도서 구입비는 투명하게
제4부 목사와 행정
목회 행정의 지혜 |거래는 투명하게 | 경청의 태도 | 주의해야 할 어법들 | 영혼 호객 행위 | 취미/오락생활 | 먹사라는 오명 | 호스피스 사역에 대한 이해 | 목회자 이중직 문제
본문 중에서
목사는 자신이 준비한 설교를 갖고 강단에 올라 그 한 편의 설교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건 채 진액을 쏟아붓는다. 그는 설교문 전체를 완벽하게 암기하되 그러나 문자의 포로가 되지 않기 위해, 그리고 성령의 자유하심을 보장하기 위해 자신의 인격에 일정한 공간과 여유를 부여하며, 경박하거나 경직되지 않도록 자신의 몸가짐에 조심하면서 말씀을 전한다. 그는 때로 포효하는 사자처럼 용맹스럽게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며, 때로 9회말 투아웃 주자 만루에 볼카운트 가 꽉 찬 상황에서 마지막 공을 던지는 투수의 심정으로 절박하게 말씀을 증거하며, 때로 죽어가는 꽃을 살리기 위해 애절하게 잎사귀를 만지는 정원사의 손길처럼 따뜻하고 간곡하게 권면한다. 그에게 설교는 인간의 화려한 만담이나 강연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이 현현하는 신적 계기의 순간이다. 그는 설교의 영광을 믿으며 또한 거기에 순종한다. 설교가 끝나고 강단을 내려온 목사에게는 이제 무거운 짐을 막 내려놓았다는 안도감이 시퍼런 파도처럼 거품을 내며 밀려온다. 그의 영혼은 잠시 동안 자유를 얻는다.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니다. 곧 이어 이루 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허탈감과 자책감이 마치 지진에 땅이 갈라지듯이 영혼의 균열을 일으키며 융기와 침강을 반복하기 시작한다.
(“근심하며 절망하는 말씀의 확성기” 중에서)
하나님을 무겁게 여긴다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일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그 뜻에 합당하게 사는 것이다. 하나님이 자신의 삶의 중심 자리를 점유하실 수 있도록 그분의 주권을 진지하게 고백하고 인정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명예가 손상되지 않도록 모든 행동거지를 조심하고 삼가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을 무겁게 여기는 삶, 곧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유의 고백과 삶은 필연적으로 대가를 요구한다. 그리고 그 대가는 주로 고난과 손해로 나타난다. 그러니 하나님의 영광이란 말을 입버릇처럼 함부로 발설할 일이 아니다. 개신교인이 말하는 대중적 의미에서의 하나님의 영광이란 말이 깃털처럼 가볍다면, 실제 하나님의 영광이란 말은 삶 전체를 짓누르는 육중한 바위처럼 무거운 단어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길” 중에서)
목회는 일종의 서사다. 그것은 목사의 삶 전체, 곧 그의 일평생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땀과 눈물의 응집물이다. 또한 그것은 진리를 위해, 정의를 위해, 무엇보다 사랑을 위해 수고하고 애쓰는 투쟁의 산물이다. 자기를 죽여 남을 살리고, 자기를 쳐서 남을 세우는 자기 부인의 전쟁터다. 주일부터 토요일까지, 매년 1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그리고 목사가 처음 되기로 결심했을 때부터 이 세상에서의 삶을 마감할 때까지 계속해서 정처없이 걸어야 하는 고단한 순례의 여정이다. 그는 그 여정에서 만나는 모든 것들, 곧 나뭇가지에 앉아 슬피 우는 새 한 마리, 들에 핀 꽃 한 송이, 길가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걸인 한 사람, 새벽 불빛을 뒤로 하고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가는 환경 미화원들의 청소차, 어디선가 들려오는 아름다운 피아노 소리, 재잘거리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하늘에 어슬렁 걸려 있는 뭉게구름 몇 개, 그 모든 것에 정성을 다해 밑줄을 긋고 사는 사람이다.
(“삶에 밑줄 긋기” 중에서)
그렇다고 고난이 목사만 골라서 피해가던가? 천만의 말씀이다. 목사도 이 세상 모든 사람이 겪는 고난을 더하지도 빼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 고스란히 다 당한다. 그에게도 모함과 협잡, 사기와 횡령, 추방과 망명, 우울과 불면, 병치레와 죽음이란 이름의 고통이 늘 주변을 기웃거리다 조그마한 틈이라도 날라 치면 득달같이 달려들어 그를 바닥에 패댕이친다. 물론 그 순간에 목사는 기도한다. 그냥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보다 더 간절히 기도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대부분 침묵하신다. 이때가 목사가 보유한 신학적 지식과 실제 신 인식 사이에 거대한 심연이 형성되는 순간이다. 그 균열이야말로 목사가 경험하는 깊은 밤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고난이란 이름의 스승” 중에서)
도시란 무엇인가? 도시는 단순히 인간들이 함께 모여 살아가는 삶의 터전이 아니다. 도시는 그보다 훨씬 복잡하고 다층적이며 다차원적인 실재다. 도시는 역사, 문화, 자본, 정보, 기계, 권력, 예술, 여행, 정주, 욕망, 배제, 소외 등등 인간 삶의 모든 측면이 응축되어 있는 “공간 인격”이다. 도시는 시간(역사)과 공간(문화)이 합종연횡 하며 새로운 권능을 가진 인격으로 존재하는 곳이다. 따라서 도시에는 필연적으로 모종의 영성이 도사리고 있다.
(“도시의 영성” 중에서)
책소개
가히 한국 개신교 수난시대다. 작금의 한국사회에서 개신교는 동네 북 신세만도 못하다. 하루가 멀다 하고 터지는 온갖 추문에 사람들은 질릴 대로 질려버렸다. 한국 개신교는 반지성과 광신의 상징이자, 혐오와 차별의 대명사처럼 여겨진다. 또한 한국사회에서 가장 완고한 이해집단이자, 마치 지리산 청학동 마을처럼 세상과 담을 쌓고 자신들만의 봉건적 방식으로 살아가는 게토와 같다. 120년 전 이 땅에 개신교가 처음 전래될 때만 해도 신학문과 신문명의 심부름꾼이자 인권과 자유의 기수로서 민족과 나라의 소망의 등불로 간주되었던 한국 개신교가 어쩌다가 이렇게까지 추락했을까. 분명한 것은 오늘 한국 개신교의 이런 치부와 참화의 중심에는 “목사들”이 자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목사의 자질, 처신, 역할에 대한 회의와 반감이 개신교 추락의 일등공신이다.
이 책은 이런 문제의식을 갖고 쓰였다. 제목이 상징하듯이 무슨 거창하고 대단한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 아니다. 기실 성서 자체는 목사의 기준을 상당히 높게 제시한다. 목사는 하나님 나라 구원의 지상적 에이전트로서 경건한 영성과 탁월한 신학적 성찰 및 고결한 윤리의식으로 무장되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에서 그런 담론은 너무 아득하고 벅차다. 따라서 이 책은 현실에서 꼭 필요한 이야기를 건넨다. 한국 개신교 목회 현장 일반에서 언제든 자연스럽게 맞닥뜨리며 우리 모두를 아프게 하고 절망케 하는 문제들과 정면으로 맞선다. 그렇지만 한국교회를 전지적 시선에서 일방적으로 비난하기보다는 “긍휼한 마음으로 껴안으며” 대화를 시도한다. 그러면서도 궁극적으로 목사다움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자고 제안한다. 짧지만 경박하지 않고, 묵직하지만 현학적이지 않은 글들을 모았다. 비단 목회자뿐 아니라 동시대 한국교회의 고민과 아픔을 공유한 일반 신자들도 함께 고민할 수 있는 주제가 가득하다.
지은이 _ 김요한
과거에는 건강한 교회를 일구는 것을 소명으로 알고 목회에 전념했으며, 현재는 새물결플러스와 새물결아카데미 대표로 섬기면서 출판과 아카데미 운동을 통해 건전한 지성을 보급하는 것을 소소한 보람으로 여기며 살고 있다. 미래에는 세상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소박한 영성가로 살아가는 것이 꿈이다.
차례
제1부 목사와 학문
복음의 대사 | 교회-하나님 나라의 대사관 | 그대의 이름은 인간이어라 | 세상을 포월함 | 동종교배를 조심하라 | 성서를 사랑하는 사람 | 근심하며 절망하는 말씀의 확성기 | 설교 표절의 덫 | 설교 마케팅 | 설교 시 주의할 예화들 | 말씀뽑기의 폐해 | 평생 학습 | 신학 공부 | 인문-사회학 공부 | 과학 공부 | 기초의학 지식 | 글쓰기 훈련
제2부 목사와 영성
목회 성공의 기준 |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길 | 욕망 관리 | 삶에 밑줄 긋기 | 십자가에 못 박힌 삶 | 순종의 훈련 | 삶의 길을 걷는 자 | 교회의 중심은 어디인가? | 고난이란 이름의 스승 | 비교 의식이란 이름의 독약 | 사람에게 아쉬운 소리하지 말아야 | 신자는 하나님의 것이다 | 감정노동 | 기도 생활 | 성령 은사 문제 | 치유의 중요성
제3부 목사와 윤리
지금 사랑하고 있는가? | 창작의 고통에 시달리는 이야기꾼 | 중립은 없다 | 시민종교라는 우상 | 도시의 영성 | 축귀 사역 | 이중 언어 구사 능력 | 증언의 사명 | 역사의식 | 젠더 감수성/양성 평등 | 가족 구조의 다양성 & 고독사 | 이성과의 식사 | 장례예식의 합리적 개선을 위하여 | 해외여행 유감 | 자녀 유학 문제 | 목회 활동비 & 도서 구입비는 투명하게
제4부 목사와 행정
목회 행정의 지혜 |거래는 투명하게 | 경청의 태도 | 주의해야 할 어법들 | 영혼 호객 행위 | 취미/오락생활 | 먹사라는 오명 | 호스피스 사역에 대한 이해 | 목회자 이중직 문제
본문 중에서
목사는 자신이 준비한 설교를 갖고 강단에 올라 그 한 편의 설교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건 채 진액을 쏟아붓는다. 그는 설교문 전체를 완벽하게 암기하되 그러나 문자의 포로가 되지 않기 위해, 그리고 성령의 자유하심을 보장하기 위해 자신의 인격에 일정한 공간과 여유를 부여하며, 경박하거나 경직되지 않도록 자신의 몸가짐에 조심하면서 말씀을 전한다. 그는 때로 포효하는 사자처럼 용맹스럽게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며, 때로 9회말 투아웃 주자 만루에 볼카운트 가 꽉 찬 상황에서 마지막 공을 던지는 투수의 심정으로 절박하게 말씀을 증거하며, 때로 죽어가는 꽃을 살리기 위해 애절하게 잎사귀를 만지는 정원사의 손길처럼 따뜻하고 간곡하게 권면한다. 그에게 설교는 인간의 화려한 만담이나 강연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이 현현하는 신적 계기의 순간이다. 그는 설교의 영광을 믿으며 또한 거기에 순종한다. 설교가 끝나고 강단을 내려온 목사에게는 이제 무거운 짐을 막 내려놓았다는 안도감이 시퍼런 파도처럼 거품을 내며 밀려온다. 그의 영혼은 잠시 동안 자유를 얻는다.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니다. 곧 이어 이루 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허탈감과 자책감이 마치 지진에 땅이 갈라지듯이 영혼의 균열을 일으키며 융기와 침강을 반복하기 시작한다.
(“근심하며 절망하는 말씀의 확성기” 중에서)
하나님을 무겁게 여긴다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일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그 뜻에 합당하게 사는 것이다. 하나님이 자신의 삶의 중심 자리를 점유하실 수 있도록 그분의 주권을 진지하게 고백하고 인정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명예가 손상되지 않도록 모든 행동거지를 조심하고 삼가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을 무겁게 여기는 삶, 곧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유의 고백과 삶은 필연적으로 대가를 요구한다. 그리고 그 대가는 주로 고난과 손해로 나타난다. 그러니 하나님의 영광이란 말을 입버릇처럼 함부로 발설할 일이 아니다. 개신교인이 말하는 대중적 의미에서의 하나님의 영광이란 말이 깃털처럼 가볍다면, 실제 하나님의 영광이란 말은 삶 전체를 짓누르는 육중한 바위처럼 무거운 단어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길” 중에서)
목회는 일종의 서사다. 그것은 목사의 삶 전체, 곧 그의 일평생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땀과 눈물의 응집물이다. 또한 그것은 진리를 위해, 정의를 위해, 무엇보다 사랑을 위해 수고하고 애쓰는 투쟁의 산물이다. 자기를 죽여 남을 살리고, 자기를 쳐서 남을 세우는 자기 부인의 전쟁터다. 주일부터 토요일까지, 매년 1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그리고 목사가 처음 되기로 결심했을 때부터 이 세상에서의 삶을 마감할 때까지 계속해서 정처없이 걸어야 하는 고단한 순례의 여정이다. 그는 그 여정에서 만나는 모든 것들, 곧 나뭇가지에 앉아 슬피 우는 새 한 마리, 들에 핀 꽃 한 송이, 길가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걸인 한 사람, 새벽 불빛을 뒤로 하고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가는 환경 미화원들의 청소차, 어디선가 들려오는 아름다운 피아노 소리, 재잘거리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하늘에 어슬렁 걸려 있는 뭉게구름 몇 개, 그 모든 것에 정성을 다해 밑줄을 긋고 사는 사람이다.
(“삶에 밑줄 긋기” 중에서)
그렇다고 고난이 목사만 골라서 피해가던가? 천만의 말씀이다. 목사도 이 세상 모든 사람이 겪는 고난을 더하지도 빼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 고스란히 다 당한다. 그에게도 모함과 협잡, 사기와 횡령, 추방과 망명, 우울과 불면, 병치레와 죽음이란 이름의 고통이 늘 주변을 기웃거리다 조그마한 틈이라도 날라 치면 득달같이 달려들어 그를 바닥에 패댕이친다. 물론 그 순간에 목사는 기도한다. 그냥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보다 더 간절히 기도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대부분 침묵하신다. 이때가 목사가 보유한 신학적 지식과 실제 신 인식 사이에 거대한 심연이 형성되는 순간이다. 그 균열이야말로 목사가 경험하는 깊은 밤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고난이란 이름의 스승” 중에서)
도시란 무엇인가? 도시는 단순히 인간들이 함께 모여 살아가는 삶의 터전이 아니다. 도시는 그보다 훨씬 복잡하고 다층적이며 다차원적인 실재다. 도시는 역사, 문화, 자본, 정보, 기계, 권력, 예술, 여행, 정주, 욕망, 배제, 소외 등등 인간 삶의 모든 측면이 응축되어 있는 “공간 인격”이다. 도시는 시간(역사)과 공간(문화)이 합종연횡 하며 새로운 권능을 가진 인격으로 존재하는 곳이다. 따라서 도시에는 필연적으로 모종의 영성이 도사리고 있다.
(“도시의 영성”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