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5.28 (월) 오후 1시-3시 새물결플러스 한달한권
「인간」 독서모임 세 번째 시간
[그들이 말하는 인간, 우리가 꿈꾸어야 할 인간다움과 공동체]
인간 책모임이 어느덧 세 번째 시간을 맞이하였습니다~!
현대 신학자 폴 틸리히에 이어서 이번에는 칼 바르트와 판넨베르크, 스탠리 그렌츠와 마이클 호튼에 대해서 다루었습니다
:)!
제5장 교의학적.관계론적 인간론: 칼 바르트
<나와 너, 타자를 위한 예수>
『하나님은 창조자이고 인간은 피조물로서, 피조물인 인간은
언제나 창조자 하나님과 관계를 가져야 한다.』
『진정한 인간은 타자와의 관계 안에 있는 인간이다. 본질적으로 "나와 너"의 관계 안에서 인간이 형성된다. "나(I)는 고립되어서는 아무 의미가 없으며 오직 "너(Thou)"와의 관계 안에서만 의미가 있다. 나는 "너"를 동시에 함축하지 않고는 "나"를 말할 수 없다.』
『"나와 너"는 두 정적인 존재로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 두 역동적인 존재, 즉 역사로서 만난다.
"나(I am)와 너(Thou are)는 서로 두 역사로서 만난다.』
『예수는 그들을 밖이나 옆에서 돕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자리를 대신하여 안으로부터 돕는다. 바르트에 의하면, "우리는 그를 그들의 것으로, 그들에 의해 그리고 그들을 위해 결정된 것으로,
그리고 각각의 그들 모두에게 속해 있는 것으로 본다."』
칼 바르트의 인간관은 교의학적 인간론으로써 하향식 인과율이고, 이는 삼위일체론에 근거하여 기독론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하여 구성됩니다. 즉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을 내적 속성이나 자질로 구성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있는 인간으로 표현합니다. 참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있는 상대자로서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즉, 하나님은 자신을 위해 인간을 창조하셨기에 인간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가는 존재라고 말합니다. 삼위일체론적 관계유비 안의 관계적 인간에 대해서는 마르틴 부버의 "나와 너" 개념을 끌고 오며 "나"는 "너"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고 이야기하고 있고, 기독론적 관계유비 안의 관계적 인간에 대해서는 디트리히 본회퍼의 "타자를 위한 교회, 타자를 위한 예수" 개념을 끌고 오면서 대유비와 원역사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제시하고, 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인간은 참된 인간성을 발견할 수 있으며, 또한 예수의 인간성(타자를 위한 예수)에서 인간의 만남을 위한 기초를 발견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기독론적 관계유비를 통해 남성과 여성의 관계를 설명하는데,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처럼 남성과 여성의 관계도 동일하다고 설명하고 있고, 영혼과 몸에 대해서는 통일된 이해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의 인간관의 장점은 인간 안의 하나님 형상을 삼위일체의 내적 관계성에 근거하여 "나와 너"의 만남과 관계의 관점에서 기독론 중심적으로 설명한 것이라고 할 수 있고, 이를 역동적인 관계적 존재론으로 규정할 수 있습니다. 이 관점에 따르면 하나님의 형상은 죄로 완전히 파괴될 수 없고 따라서 인간 안의 하나님 형상은 내용적으로는 왜곡 또는 파괴되었지만 형식적 또는 구조적으로는 여전히 남아있다고 볼 수 있으며, 이는 칼빈의 거울로서의 하나님 형상 이해와 일치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의 인간관의 단점은 하나님의 형상을 하나님의 복제품이라고 말하면서, 인간 안의 하나님 형상은 하나님의 하나님 형상을 반영, 모방, 복제한 것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인간성은 완전히 사라져버린 하나님의 형상으로써의 인간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과
기독론적 관계유비를 통한 남성과 여성 이해에서 아들이 아버지에게 순종하듯, 여성이 남성에게 순종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며, 이 둘은 우월과 종속 관계에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관계 유비의 원천은 기독론적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내적 삼위일체적 관계에서 발견되어야 합니다. 삼위일체의 내적 관계에서는 세 위격들간의 상호적이고 평등적인 관게 안에서 페리코레시스적인 사랑의 친교적 연합이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으며, 따라서 이와 같은 삼위일체의 내적 관계를 반영하는 인간과 인간(남성과 여성을 포함하는)의 일반적인 관계는 상호적이고 평등적인 관계여야 합니다.
제6장 변증적.교의학적 인간론: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
-종말론적 운명과 개방된 역사로서의 인간-
칼 바르트의 인간관이 교의학적 인간론으로써 하향식 인과율이었다면, 판넨베르크의 인간관은 변증적.교의학적 인간론으로써 상향식 인과율입니다. 일반 학문과의 인간론과의 대화를 거부하고 철저하게 성서적이고 그리스도 중심적인 신학적 인간론을 추구하는 바르트와 달리 그는 변증학적 관점에서 세속의 일반 학문들과의 대화를 수행합니다. 그의 관심은 세속적 비판에 대한 신학적 변증에 있습니다. 그의 신학은 오직 종말론적 미래가 하나님의 실재와 세계 및 인간의 운명을 결정하고, 하나님 형상은 시초가 아니라 미래에 완성되어야 할 운명으로 주어지기에 하나님의 형상은 창조뿐만 아니라 구속 및 종말과도 관계된다고 이야기합니다.
판넨베르크에게 인간의 본성은 곧 종말론적 운명이며 동시에 역사입니다. 인간의 운명적 본성의 목표는 하나님 형상의 구현, 즉 하나님과의 교제 안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삶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형상을 세계 개방성의 관점에서 설명합니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의 형상은 처음부터 완성된 형태로 주어지지 않고 역사적 과정을 거쳐 종말론적 미래에 완성되어야 하기 때문에 인간은 열려진 미래로서의 자신의 운명의 성취를 향한 과정 속에 있는 역사적 존재입니다. "인간의 본성은 인간 운명의 실현의 역사 자체다.역사는 인간의 미래의 운명을 향한 형성적 과정이다"
상호 존중이 모든 참된 인간관계의 토대입니다. 따라서 기독교인의 책임은 다른 사람이 그 자신의 운명을 실현하도록, 하나님의 형사 안에서의 완전한 의미에서 인간이 되도록 (기회가 닿는 대로) 돕는 것입니다. 개인의 독특성은 바로 공동체 안에서 발생하며 또한 공동체적 통일성은 개인의 독특성을 통해 발생합니다. 따라서 (공동체적) 통일성은 개인들의 독특성에도 불구하고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들의 독특성을 통해"그리고 개인들 간의 유대와 조정을 통해 성취됩니다. 우리의 운명은 하나님과의 교제이기 때문에, 운명으로부터의 분리 즉 죄는 바로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를 의미합니다. 인간의 죄는 하나님의 형상의 종말론적 완성의 선취자인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안에 치유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 안에서 세계의 종말론적 미래가 이미 구원으로 도래하였으며, 하나님의 형상의 종말론적 완성을 향한 인간의 본래적인 역사적 과정이 회복되었습니다. 인간의 운명으로서 하나님의 형상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완성되었으며 그 안에서 선취적으로 현존합니다. 예수는 창조세계와 인간 역사의 종말론적 완성이며 동시에 그 종말론적 완성의 역사적 선취이고, 창조세계는 예수를 향해 나아가며 동시에 예수를 통해 종말론적 완성에 이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의 지고선으로서 기독교적이면서도 보편적 윤리의 토대가 됩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의 윤리적 행동을 위한 영감의 원천이자 방향 지시자이며 목표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운명을 실현하는 것은 인간의 피조물적 본성에 속하고, 인간의 운명은 자아의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본질의 외심적 성격과 공명합니다. 이미 승리는 약속되었지만, 이 승리는 성령의 능력 안에서 믿음의 투쟁과 기도에 의해서만 실현 가능합니다. 그 최종적 성취는 인간의 노력의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믿음의 응답을 통해서만 실현 가능합니다.
판넨베르크는 보편적 신학을 추구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존재의 창조자이며 모든 진리의 근거인 한, 하나님은 모든 실재와 관련성을 가져야 하며, 하나님에 관한 학문인 신학은 실재의 본성에 대한 보편적인 주장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모든 영역의 지식과 관련되어야 합니다. 신앙은 맹목적인 신뢰가 아니라 오직 자신을 신뢰할 만한 것으로 나타내는 것을 지향합니다. 합리적 근거가 결여되어 있지 않으며 지성적으로 책임적이어야 합니다.
역사는 보편적 범주로서, 예수의 부활은 보편적 세계의 역사 전체가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종말론적 계시의 빛 안에서 통일성을 성취하고, 기독교 윤리는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를 토대로 두기 때문에 보편적 윤리가 됩니다. 죄의 본질은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이지만 그러한 주장의 설득력은 경험적 자료들에 의해 드러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피조물로서의 인간은 애초부터 하나님과의 운명적 교제의 성향을 부여받았으며, 인간 운명의 완성은 피조물과의 단절이 아니라 인간 자아의 구속과 변혁을 통한 본래적인 피조물적 성향의 현실화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판넨베르크의 종말 이해는 성경 마지막이 요한계시록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와 일치한다고 봅니다. "신실하게 믿음으로 지금을 살라"는 것, 종말은 이미 시작되었으나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다는 것, 그러니 서로를 존중하며 공동체 가운데 하나님과의 영원한 교제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삶을 살라는 것이 그의 종말론의 의의라고 봅니다.
제7장 관계성 안의 이야기적 자아로서의 탈근대적 인간론:
스탠리 그렌츠와 마이클 호튼
저자인 윤철호 교수님은 서론에서 탈근대적 상황 속에서 기독교의 인간 이해를 새롭게 재구성하려는 시도로 스탠리 그랜츠와 마이클 호튼의 글을 가져오시면서 이를 소개, 비교, 분석함으로써 인간 인격이 하나님과의 계약의 관계성 안에서 구성되며 종말론적으로 완성되는 이야기적 자아이고, 이와 같은 인간 인격에 있어 하나님의 행동에 관한 직설법과 인간의 행동을 위한 명령법이 우선순위에 따라 변증법적으로 통합되어야 함을 논증하고자 합니다.
스탠리 그렌츠는 성서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형상 개념을 오늘날의 사회적 삼위일체론의 관계론적 존재론과 연결시킴으로써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구성되는 교회적 자아"를 제안합니다. 어거스틴이 이야기한 내면으로의 여정을 통해 자아가 부상했지만, 계몽주의 사회를 거치면서 이 근대적 자아는 세계와 자신을 지배하는 이성적 자아가 되었고 자기표현적 자아를 거쳐, 낭만주의적인 중심적 자아를 넘어 자아는 소멸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랜츠는 탈근대적 자아의 죽음은 자아의 부재만이 아닌, 이야기적 자아라는 새로운 자아 개념을 창출했다고 이야기합니다. 이야기적 자아의 경험-조직화 "플롯"은 자신의 사회집단 (또는 준거 공동체)으로부터 생겨납니다. 따라서 탈근대적 자아는 관계성에서 정체성을 찾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그랜츠는 인간 안의 하나님의 형상을 성서에 기초한 그리스도-인간론의 관점에서 설명합니다. 인간 안의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이 창조세계 안에서 초월적 창조자가 내재하도록 매개하는 것을 제시합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형상은 신약성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나고, 하나님의 형상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영광을 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렌츠는 하나님의 형상이 개인 자체에 있지 않고 공동체 안에서의 인격들의 관계성에 있으며, 따라서 신적인 원형과 인간의 모형을 함꼐 묶는 관계론적 존재론이 요청된다고 말합니다. 남녀 인간과 하나님의 형상 사이의 길은 새로운 인간의 선취인 교회를 통해 인도되며 따라서 관계적 자아는 교회적 자아입니다. 성령은 새로운 인간을 그리스도와 연합시킴으로써 신자들을 신적 삶으로 이끕니다. 그에게 인격은 관계성에 의존하는 것이며 충만한 관계성은 삼위일체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관계성 안에 있음은 예수의 이야기에 함께 참여하는 새로운 교회적 인간들과의 관계성 안에 있음을 포함하며, 심지어 관계성에 의해 인간이 구성된다. 내주하는 성령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페리코레시스적인 삶의 패턴을 따라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새로운 인간을 선취적으로 포괄하는 것처럼, 성령은 그리스도의 교회적 공동체 안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자아'와, 더 나아가서는 세상의 '자아'를 지속적으로 구성한다."
마이클 호튼은 인간을 개혁파 전통을 따라 이중적인 하나님과의 계약 관계, 즉 창조계약과 은혜계약 안에 있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계약신학의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이 된다는 것은 성서 이야기 안에서 인간에게 주어진 특수한 위임에 있고, 성서 저자들에게 인간이 된다는 것은 형이상학적-존재론적 문제가 아니라 이야기적-윤리적 문제입니다. 인간은 본성상 계약적이기 때문에 또한 미래 지향적 존재이고, 이 형상의 완성은 미래에 성취될 것이기에 인간의 인격은 회고적이면서 또한 예기적,종말론적인 정체성을 가집니다. 호튼은 인격이 "드라마적인 이야기 구성"의 관점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호튼에게 인간 안의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이 하나님과의 계약의 상대방이 된다는 사실에 있고, 하나님의 형상을 직무와 위임 그리고 종말론적으로 정위된 계약적 위임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예수는 사적인 개인이 아니라 자신의 계약의 백성들을 대표하는 대표자로서의 행동을 통해 왕적 아들이 되었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은 하나님이 아담에게 부여하신 창조질서 안에서의 지배적 위치를 회복합니다. 이와 같은 대표로서의 그리스도의 직무는 상호성이 본질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즉 영광의 영이 거하는 전으로 재창조된 존재들이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왕의 직무와 관련되는 사법적 기능을 가진 왕적 아들입니다. 인간 안의 하나님 형상의 갱신은 그리스도의 원형적 영광의 형상을 인간에게 나누어짐으로써 이루어집니다. 그리스도는 본래적인 빛이며, 그리스도가 자신의 형상으로 창조하는 교회는 반사하는 빛, 예언자적 증인입니다. 그는 인간 안에 있는하나님의 형상이 본질적이라기보다 직무적이고, 존재론적이라기보다 윤리적이며, 형이상학적이라기보다 종말론적임을 거듭 강조합니다. 인간은 이야기적 존재로서 "이미 말해진 이야기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며 만들어져가는 이야기 안에서 자신을 구성함으로써 자신을 형성하고자 합니다." 계약적 자아는 "예언자적 소명을 위한 이야기 학교에서 부름을 받은 주체"입니다. 이 "소명의 이야기"가 예언자의 자기 정체성을 구성합니다. 호튼은 이 소명을 단지 성서의 예언자만이 아니라 창조 안의 모든 인간과 구속받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일반적인 직무로 이해합니다.
이 둘은 성서에 기초하여 인간 인격을 관계론적 범주 안에서 새롭게 설명하고자 했습니다. 공통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인간 인격의 이해를 위한 근본적인 토대로 삼았고, 인간 안의 하나님의 형상을 종말론적 관점에서 이해했고, 인간 인격을 정태적.본질부의적 관점이 아니라 역동적.역사적.이야기적 관점에서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차이점도 존재합니다. 그렌츠의 인간론은 그리스도 중심적.삼위일체적.교회론적입니다. 인간 안의 하나님의 형상을 피조세계 안에서 하나님을 대표하는 신적 표상으로 이해하는 인간론에 기초하여 그랜츠는 하나님의 형상의 그리스도론적 회복을 말합니다. 그는 인간 인격이 성령에 의해,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를 중심으로 구성되고 종말론적으로 완성되는 이야기적 자아임을 논증하면서, 이 형상의 회복과 완성은 궁극적으로 인간이 윤리적 노력에 의해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로 주어지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호튼은 인간 대표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창조계약의 성취를 통한 구속(은혜계약)의 실현에 대해 말하며, 이는 기본적으로 칼뱅주의의 형벌대속의 구속교리와 일맥상통합니다. 하나님과의 계약을 통해 구성되는 인간의 이야기적 정체성의 본질은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인간의 윤리적 응답에 있지 않고, 그것을 선행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언에 있다. (마 28:20) 그것은 우리와 함께 하시고 힘을 주시며 마침내 그 명령을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고, 이 같은 약속에 의지하여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혜계약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은 "이미"와 "아직"의 변증법적 긴장 관계 안에서 종말론적 완성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고 합니다. 공통적으로 이 둘은 인간 인격이 하나님과의 관계성 안에서 구성되며 종말론적으로 완성되는 이야기적 자아임을 말하며, 또한 이 두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의 행동과 인간의 윤리적 행동을 함께 말합니다. 그랜츠에게서는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의 행동이 우세한 반면, 호튼에게서는 윤리적 직무를 위한 인간의 행동이 지배적으로 강조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계약의 관계성 안에서 구성되며 종말론적으로 완성되는 이야기적 자아로서의 인간의 역사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행동(직설법)과 인간의 윤리적 행동(명령법)은 변증법적으로 통합되어야 하며, 이 변증법적 통합에서 인간의 윤리적 행동은 결코 하나님의 은혜의 행동보다 앞서거나 더 강조될 수 없습니다.
현대 신학자들의 인간 이해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주는 것 같습니다. 칼 바르트의 너와 나, 타자를 위한 예수 / 판넨베르크 - 공동체를 통한 하나님 나라 소망 / 스탠리 그렌츠 - 예수 그리스도 안의 새로운 공동체 / 마이클 호튼 - 하나님이 써나가시는 각자의 이야기... 이들의 인간 이해를 배우면서 우리가 꿈꾸고 이루어가야 할 하나님의 형상이 어떤 것일까라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고, 이야기한 신학자들의 책을 좀 더 깊이 읽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이런 것을 실현해갈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고민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할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끝으로 모임끝나고 열린 미로슬라브 볼프 강의 세 구절을 인용함으로써 후기를 마치려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을 어떻게 이해하며 받아들이고, 대할 수 있을지 고민하며 배제와 폭력과 억압과 정죄의 기독교가 포용과 자비와 참 자유와 참 사랑의 종교로 그들에게 다가갈 수 있기를, 참 인간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본을 따라 그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며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공동체를 이루어갈 수 있기를 두 손 모아 소망하고 기도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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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영의 삶 (Flourishing Life)"은 인간이 얻고자 노력하는 선(善) (The good '좋은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바라는 여러가지 것을 가리킨다기보다는 우리가 얻고자 노력하는 궁극적인 목표를 말한다. 즉, 참으로 바랄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결정하는 가치들의 목록을 따라 우리가 얻고자 노력하는 궁극적인 목표를 가리킨다.]
신학은 취향이 이끌어가는 개인주의화된 무반성적인 삶의 방식들을 논박하는 데에 공헌할 수 있고,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과 모든 창조세계를 위한 번영의 삶의 설득력 있는 비전을, 참된 삶의 비전을 표현하고 수용하고 추구하는 것을 돕는 데에 공헌할 수 있다.
[신학은 위기에 처해 있다. 신학이 용기를 상실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비추어 번영의 삶에 관한 설득력 있는 비전들을 파악하고 자세히 표현하고 권하는 사역을 돕는 신학의 목적을 망각하였기 때문이다.]
#새물결아카데미 #한달한권 #인간 #세번째모임
#칼바르트 #판넨베르크 #마이클호튼 #스탠리그렌츠
2018.5.28 (월) 오후 1시-3시 새물결플러스 한달한권
「인간」 독서모임 세 번째 시간
[그들이 말하는 인간, 우리가 꿈꾸어야 할 인간다움과 공동체]
인간 책모임이 어느덧 세 번째 시간을 맞이하였습니다~!
:)!
현대 신학자 폴 틸리히에 이어서 이번에는 칼 바르트와 판넨베르크, 스탠리 그렌츠와 마이클 호튼에 대해서 다루었습니다
제5장 교의학적.관계론적 인간론: 칼 바르트
<나와 너, 타자를 위한 예수>
『하나님은 창조자이고 인간은 피조물로서, 피조물인 인간은
언제나 창조자 하나님과 관계를 가져야 한다.』
『진정한 인간은 타자와의 관계 안에 있는 인간이다. 본질적으로 "나와 너"의 관계 안에서 인간이 형성된다. "나(I)는 고립되어서는 아무 의미가 없으며 오직 "너(Thou)"와의 관계 안에서만 의미가 있다. 나는 "너"를 동시에 함축하지 않고는 "나"를 말할 수 없다.』
『"나와 너"는 두 정적인 존재로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 두 역동적인 존재, 즉 역사로서 만난다.
"나(I am)와 너(Thou are)는 서로 두 역사로서 만난다.』
『예수는 그들을 밖이나 옆에서 돕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자리를 대신하여 안으로부터 돕는다. 바르트에 의하면, "우리는 그를 그들의 것으로, 그들에 의해 그리고 그들을 위해 결정된 것으로,
그리고 각각의 그들 모두에게 속해 있는 것으로 본다."』
칼 바르트의 인간관은 교의학적 인간론으로써 하향식 인과율이고, 이는 삼위일체론에 근거하여 기독론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하여 구성됩니다. 즉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을 내적 속성이나 자질로 구성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있는 인간으로 표현합니다. 참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있는 상대자로서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즉, 하나님은 자신을 위해 인간을 창조하셨기에 인간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가는 존재라고 말합니다. 삼위일체론적 관계유비 안의 관계적 인간에 대해서는 마르틴 부버의 "나와 너" 개념을 끌고 오며 "나"는 "너"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고 이야기하고 있고, 기독론적 관계유비 안의 관계적 인간에 대해서는 디트리히 본회퍼의 "타자를 위한 교회, 타자를 위한 예수" 개념을 끌고 오면서 대유비와 원역사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제시하고, 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인간은 참된 인간성을 발견할 수 있으며, 또한 예수의 인간성(타자를 위한 예수)에서 인간의 만남을 위한 기초를 발견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기독론적 관계유비를 통해 남성과 여성의 관계를 설명하는데,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처럼 남성과 여성의 관계도 동일하다고 설명하고 있고, 영혼과 몸에 대해서는 통일된 이해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의 인간관의 장점은 인간 안의 하나님 형상을 삼위일체의 내적 관계성에 근거하여 "나와 너"의 만남과 관계의 관점에서 기독론 중심적으로 설명한 것이라고 할 수 있고, 이를 역동적인 관계적 존재론으로 규정할 수 있습니다. 이 관점에 따르면 하나님의 형상은 죄로 완전히 파괴될 수 없고 따라서 인간 안의 하나님 형상은 내용적으로는 왜곡 또는 파괴되었지만 형식적 또는 구조적으로는 여전히 남아있다고 볼 수 있으며, 이는 칼빈의 거울로서의 하나님 형상 이해와 일치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의 인간관의 단점은 하나님의 형상을 하나님의 복제품이라고 말하면서, 인간 안의 하나님 형상은 하나님의 하나님 형상을 반영, 모방, 복제한 것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인간성은 완전히 사라져버린 하나님의 형상으로써의 인간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과
기독론적 관계유비를 통한 남성과 여성 이해에서 아들이 아버지에게 순종하듯, 여성이 남성에게 순종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며, 이 둘은 우월과 종속 관계에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관계 유비의 원천은 기독론적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내적 삼위일체적 관계에서 발견되어야 합니다. 삼위일체의 내적 관계에서는 세 위격들간의 상호적이고 평등적인 관게 안에서 페리코레시스적인 사랑의 친교적 연합이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으며, 따라서 이와 같은 삼위일체의 내적 관계를 반영하는 인간과 인간(남성과 여성을 포함하는)의 일반적인 관계는 상호적이고 평등적인 관계여야 합니다.
제6장 변증적.교의학적 인간론: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
-종말론적 운명과 개방된 역사로서의 인간-
칼 바르트의 인간관이 교의학적 인간론으로써 하향식 인과율이었다면, 판넨베르크의 인간관은 변증적.교의학적 인간론으로써 상향식 인과율입니다. 일반 학문과의 인간론과의 대화를 거부하고 철저하게 성서적이고 그리스도 중심적인 신학적 인간론을 추구하는 바르트와 달리 그는 변증학적 관점에서 세속의 일반 학문들과의 대화를 수행합니다. 그의 관심은 세속적 비판에 대한 신학적 변증에 있습니다. 그의 신학은 오직 종말론적 미래가 하나님의 실재와 세계 및 인간의 운명을 결정하고, 하나님 형상은 시초가 아니라 미래에 완성되어야 할 운명으로 주어지기에 하나님의 형상은 창조뿐만 아니라 구속 및 종말과도 관계된다고 이야기합니다.
판넨베르크에게 인간의 본성은 곧 종말론적 운명이며 동시에 역사입니다. 인간의 운명적 본성의 목표는 하나님 형상의 구현, 즉 하나님과의 교제 안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삶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형상을 세계 개방성의 관점에서 설명합니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의 형상은 처음부터 완성된 형태로 주어지지 않고 역사적 과정을 거쳐 종말론적 미래에 완성되어야 하기 때문에 인간은 열려진 미래로서의 자신의 운명의 성취를 향한 과정 속에 있는 역사적 존재입니다. "인간의 본성은 인간 운명의 실현의 역사 자체다.역사는 인간의 미래의 운명을 향한 형성적 과정이다"
상호 존중이 모든 참된 인간관계의 토대입니다. 따라서 기독교인의 책임은 다른 사람이 그 자신의 운명을 실현하도록, 하나님의 형사 안에서의 완전한 의미에서 인간이 되도록 (기회가 닿는 대로) 돕는 것입니다. 개인의 독특성은 바로 공동체 안에서 발생하며 또한 공동체적 통일성은 개인의 독특성을 통해 발생합니다. 따라서 (공동체적) 통일성은 개인들의 독특성에도 불구하고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들의 독특성을 통해"그리고 개인들 간의 유대와 조정을 통해 성취됩니다. 우리의 운명은 하나님과의 교제이기 때문에, 운명으로부터의 분리 즉 죄는 바로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를 의미합니다. 인간의 죄는 하나님의 형상의 종말론적 완성의 선취자인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안에 치유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 안에서 세계의 종말론적 미래가 이미 구원으로 도래하였으며, 하나님의 형상의 종말론적 완성을 향한 인간의 본래적인 역사적 과정이 회복되었습니다. 인간의 운명으로서 하나님의 형상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완성되었으며 그 안에서 선취적으로 현존합니다. 예수는 창조세계와 인간 역사의 종말론적 완성이며 동시에 그 종말론적 완성의 역사적 선취이고, 창조세계는 예수를 향해 나아가며 동시에 예수를 통해 종말론적 완성에 이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의 지고선으로서 기독교적이면서도 보편적 윤리의 토대가 됩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의 윤리적 행동을 위한 영감의 원천이자 방향 지시자이며 목표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운명을 실현하는 것은 인간의 피조물적 본성에 속하고, 인간의 운명은 자아의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본질의 외심적 성격과 공명합니다. 이미 승리는 약속되었지만, 이 승리는 성령의 능력 안에서 믿음의 투쟁과 기도에 의해서만 실현 가능합니다. 그 최종적 성취는 인간의 노력의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믿음의 응답을 통해서만 실현 가능합니다.
판넨베르크는 보편적 신학을 추구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존재의 창조자이며 모든 진리의 근거인 한, 하나님은 모든 실재와 관련성을 가져야 하며, 하나님에 관한 학문인 신학은 실재의 본성에 대한 보편적인 주장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모든 영역의 지식과 관련되어야 합니다. 신앙은 맹목적인 신뢰가 아니라 오직 자신을 신뢰할 만한 것으로 나타내는 것을 지향합니다. 합리적 근거가 결여되어 있지 않으며 지성적으로 책임적이어야 합니다.
역사는 보편적 범주로서, 예수의 부활은 보편적 세계의 역사 전체가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종말론적 계시의 빛 안에서 통일성을 성취하고, 기독교 윤리는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를 토대로 두기 때문에 보편적 윤리가 됩니다. 죄의 본질은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이지만 그러한 주장의 설득력은 경험적 자료들에 의해 드러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피조물로서의 인간은 애초부터 하나님과의 운명적 교제의 성향을 부여받았으며, 인간 운명의 완성은 피조물과의 단절이 아니라 인간 자아의 구속과 변혁을 통한 본래적인 피조물적 성향의 현실화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판넨베르크의 종말 이해는 성경 마지막이 요한계시록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와 일치한다고 봅니다. "신실하게 믿음으로 지금을 살라"는 것, 종말은 이미 시작되었으나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다는 것, 그러니 서로를 존중하며 공동체 가운데 하나님과의 영원한 교제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삶을 살라는 것이 그의 종말론의 의의라고 봅니다.
제7장 관계성 안의 이야기적 자아로서의 탈근대적 인간론:
스탠리 그렌츠와 마이클 호튼
저자인 윤철호 교수님은 서론에서 탈근대적 상황 속에서 기독교의 인간 이해를 새롭게 재구성하려는 시도로 스탠리 그랜츠와 마이클 호튼의 글을 가져오시면서 이를 소개, 비교, 분석함으로써 인간 인격이 하나님과의 계약의 관계성 안에서 구성되며 종말론적으로 완성되는 이야기적 자아이고, 이와 같은 인간 인격에 있어 하나님의 행동에 관한 직설법과 인간의 행동을 위한 명령법이 우선순위에 따라 변증법적으로 통합되어야 함을 논증하고자 합니다.
스탠리 그렌츠는 성서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형상 개념을 오늘날의 사회적 삼위일체론의 관계론적 존재론과 연결시킴으로써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구성되는 교회적 자아"를 제안합니다. 어거스틴이 이야기한 내면으로의 여정을 통해 자아가 부상했지만, 계몽주의 사회를 거치면서 이 근대적 자아는 세계와 자신을 지배하는 이성적 자아가 되었고 자기표현적 자아를 거쳐, 낭만주의적인 중심적 자아를 넘어 자아는 소멸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랜츠는 탈근대적 자아의 죽음은 자아의 부재만이 아닌, 이야기적 자아라는 새로운 자아 개념을 창출했다고 이야기합니다. 이야기적 자아의 경험-조직화 "플롯"은 자신의 사회집단 (또는 준거 공동체)으로부터 생겨납니다. 따라서 탈근대적 자아는 관계성에서 정체성을 찾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그랜츠는 인간 안의 하나님의 형상을 성서에 기초한 그리스도-인간론의 관점에서 설명합니다. 인간 안의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이 창조세계 안에서 초월적 창조자가 내재하도록 매개하는 것을 제시합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형상은 신약성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나고, 하나님의 형상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영광을 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렌츠는 하나님의 형상이 개인 자체에 있지 않고 공동체 안에서의 인격들의 관계성에 있으며, 따라서 신적인 원형과 인간의 모형을 함꼐 묶는 관계론적 존재론이 요청된다고 말합니다. 남녀 인간과 하나님의 형상 사이의 길은 새로운 인간의 선취인 교회를 통해 인도되며 따라서 관계적 자아는 교회적 자아입니다. 성령은 새로운 인간을 그리스도와 연합시킴으로써 신자들을 신적 삶으로 이끕니다. 그에게 인격은 관계성에 의존하는 것이며 충만한 관계성은 삼위일체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관계성 안에 있음은 예수의 이야기에 함께 참여하는 새로운 교회적 인간들과의 관계성 안에 있음을 포함하며, 심지어 관계성에 의해 인간이 구성된다. 내주하는 성령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페리코레시스적인 삶의 패턴을 따라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새로운 인간을 선취적으로 포괄하는 것처럼, 성령은 그리스도의 교회적 공동체 안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자아'와, 더 나아가서는 세상의 '자아'를 지속적으로 구성한다."
마이클 호튼은 인간을 개혁파 전통을 따라 이중적인 하나님과의 계약 관계, 즉 창조계약과 은혜계약 안에 있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계약신학의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이 된다는 것은 성서 이야기 안에서 인간에게 주어진 특수한 위임에 있고, 성서 저자들에게 인간이 된다는 것은 형이상학적-존재론적 문제가 아니라 이야기적-윤리적 문제입니다. 인간은 본성상 계약적이기 때문에 또한 미래 지향적 존재이고, 이 형상의 완성은 미래에 성취될 것이기에 인간의 인격은 회고적이면서 또한 예기적,종말론적인 정체성을 가집니다. 호튼은 인격이 "드라마적인 이야기 구성"의 관점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호튼에게 인간 안의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이 하나님과의 계약의 상대방이 된다는 사실에 있고, 하나님의 형상을 직무와 위임 그리고 종말론적으로 정위된 계약적 위임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예수는 사적인 개인이 아니라 자신의 계약의 백성들을 대표하는 대표자로서의 행동을 통해 왕적 아들이 되었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은 하나님이 아담에게 부여하신 창조질서 안에서의 지배적 위치를 회복합니다. 이와 같은 대표로서의 그리스도의 직무는 상호성이 본질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즉 영광의 영이 거하는 전으로 재창조된 존재들이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왕의 직무와 관련되는 사법적 기능을 가진 왕적 아들입니다. 인간 안의 하나님 형상의 갱신은 그리스도의 원형적 영광의 형상을 인간에게 나누어짐으로써 이루어집니다. 그리스도는 본래적인 빛이며, 그리스도가 자신의 형상으로 창조하는 교회는 반사하는 빛, 예언자적 증인입니다. 그는 인간 안에 있는하나님의 형상이 본질적이라기보다 직무적이고, 존재론적이라기보다 윤리적이며, 형이상학적이라기보다 종말론적임을 거듭 강조합니다. 인간은 이야기적 존재로서 "이미 말해진 이야기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며 만들어져가는 이야기 안에서 자신을 구성함으로써 자신을 형성하고자 합니다." 계약적 자아는 "예언자적 소명을 위한 이야기 학교에서 부름을 받은 주체"입니다. 이 "소명의 이야기"가 예언자의 자기 정체성을 구성합니다. 호튼은 이 소명을 단지 성서의 예언자만이 아니라 창조 안의 모든 인간과 구속받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일반적인 직무로 이해합니다.
이 둘은 성서에 기초하여 인간 인격을 관계론적 범주 안에서 새롭게 설명하고자 했습니다. 공통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인간 인격의 이해를 위한 근본적인 토대로 삼았고, 인간 안의 하나님의 형상을 종말론적 관점에서 이해했고, 인간 인격을 정태적.본질부의적 관점이 아니라 역동적.역사적.이야기적 관점에서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차이점도 존재합니다. 그렌츠의 인간론은 그리스도 중심적.삼위일체적.교회론적입니다. 인간 안의 하나님의 형상을 피조세계 안에서 하나님을 대표하는 신적 표상으로 이해하는 인간론에 기초하여 그랜츠는 하나님의 형상의 그리스도론적 회복을 말합니다. 그는 인간 인격이 성령에 의해,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를 중심으로 구성되고 종말론적으로 완성되는 이야기적 자아임을 논증하면서, 이 형상의 회복과 완성은 궁극적으로 인간이 윤리적 노력에 의해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로 주어지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호튼은 인간 대표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창조계약의 성취를 통한 구속(은혜계약)의 실현에 대해 말하며, 이는 기본적으로 칼뱅주의의 형벌대속의 구속교리와 일맥상통합니다. 하나님과의 계약을 통해 구성되는 인간의 이야기적 정체성의 본질은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인간의 윤리적 응답에 있지 않고, 그것을 선행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언에 있다. (마 28:20) 그것은 우리와 함께 하시고 힘을 주시며 마침내 그 명령을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고, 이 같은 약속에 의지하여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혜계약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은 "이미"와 "아직"의 변증법적 긴장 관계 안에서 종말론적 완성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고 합니다. 공통적으로 이 둘은 인간 인격이 하나님과의 관계성 안에서 구성되며 종말론적으로 완성되는 이야기적 자아임을 말하며, 또한 이 두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의 행동과 인간의 윤리적 행동을 함께 말합니다. 그랜츠에게서는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의 행동이 우세한 반면, 호튼에게서는 윤리적 직무를 위한 인간의 행동이 지배적으로 강조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계약의 관계성 안에서 구성되며 종말론적으로 완성되는 이야기적 자아로서의 인간의 역사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행동(직설법)과 인간의 윤리적 행동(명령법)은 변증법적으로 통합되어야 하며, 이 변증법적 통합에서 인간의 윤리적 행동은 결코 하나님의 은혜의 행동보다 앞서거나 더 강조될 수 없습니다.
현대 신학자들의 인간 이해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주는 것 같습니다. 칼 바르트의 너와 나, 타자를 위한 예수 / 판넨베르크 - 공동체를 통한 하나님 나라 소망 / 스탠리 그렌츠 - 예수 그리스도 안의 새로운 공동체 / 마이클 호튼 - 하나님이 써나가시는 각자의 이야기... 이들의 인간 이해를 배우면서 우리가 꿈꾸고 이루어가야 할 하나님의 형상이 어떤 것일까라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고, 이야기한 신학자들의 책을 좀 더 깊이 읽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이런 것을 실현해갈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고민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할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끝으로 모임끝나고 열린 미로슬라브 볼프 강의 세 구절을 인용함으로써 후기를 마치려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을 어떻게 이해하며 받아들이고, 대할 수 있을지 고민하며 배제와 폭력과 억압과 정죄의 기독교가 포용과 자비와 참 자유와 참 사랑의 종교로 그들에게 다가갈 수 있기를, 참 인간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본을 따라 그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며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공동체를 이루어갈 수 있기를 두 손 모아 소망하고 기도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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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영의 삶 (Flourishing Life)"은 인간이 얻고자 노력하는 선(善) (The good '좋은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바라는 여러가지 것을 가리킨다기보다는 우리가 얻고자 노력하는 궁극적인 목표를 말한다. 즉, 참으로 바랄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결정하는 가치들의 목록을 따라 우리가 얻고자 노력하는 궁극적인 목표를 가리킨다.]
신학은 취향이 이끌어가는 개인주의화된 무반성적인 삶의 방식들을 논박하는 데에 공헌할 수 있고,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과 모든 창조세계를 위한 번영의 삶의 설득력 있는 비전을, 참된 삶의 비전을 표현하고 수용하고 추구하는 것을 돕는 데에 공헌할 수 있다.
[신학은 위기에 처해 있다. 신학이 용기를 상실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비추어 번영의 삶에 관한 설득력 있는 비전들을 파악하고 자세히 표현하고 권하는 사역을 돕는 신학의 목적을 망각하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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