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함 with 솔라
칭의 논쟁 신성화_벨리_마티 카르카넨
발제자 : 김주성 원우
5.15(화) 목원대학교 신학대학원
목차
1. 김주성 원우의 발제 / 2.느낀점
신성화
각 교단간 관계 회복 가능성의 제기
로마 가톨릭과 루터파의 갈등(칭의교리)
루터파 - 법정적 행위, 의롭다는 선언
로마 가톨릭 - 칭의는 사람을 의롭게 만드는 것
동방 정교회 신성화 개념에 대한 루터파의 답변
1.신성화는 하나님의 영광을 후려치는 것
2.신인협력적 관점의 강요
3.자유의지라는 발상을 옹호하는 것
그러나, ‘칭의와 신성화로서의 구원’(1977)에 나타난 대화를 통해 이러한 갈등을
극복하고자함.
구원의 중요한 두 가지 측면(칭의와 신성화)이 신약성서의 강력한 기반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상당한 일치를 보인다.
만네르마(Mannermaa) 학파는 루터 신학의 새 해석을 제공 -루터 신학의 대안적 읽기-을 통해
러시아 정교회와 핀란드 루터 교회 간의 대화를 낳았다.
새 해석의 기본 논지와 주장의 요약
1. 루터가 구원을 이해한 방식은 칭의 교리의 용어들뿐만 아니라 신성화에 관한
용어들로도 표현될 수 있다.
2. 루터 칭의 주개념은 믿음 안에서 그리스도의 현존이다. 성령을 통해 신자의 마음에
그리스도가 내주하심을 통해 신자가 하나님에게 ‘실재적, 본체적’으로 참여한다.
3. 루터는 법정적이고 유효한 칭의를 구분하지 않고 둘 모두가 칭의라고 했다.
4. 칭의는 성화뿐만 아니라 선한 행위를 포함. 믿음 안에 그리스도의 현존이 그를 한 명의
‘그리스도’로 만들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의는 프로테스탄트(칭의로서 구원)와 동방정교회(신성화로서 구원) 사이의 수렴을
통해 프로테스탄트와 로마 가톨릭 사이 관계의 회복 가능성을 제공한다.
하나님께 참여함 및 신성화로서 칭의
루터의 칭의 교리를 다시 정립하고자 할 때, 루터가 말하는 ‘참된 믿음’은 ‘그리스도가 그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 믿음 안에 현존하고, 이 현존을 통해 그리스도는 믿음의 의와
동일하다.’라고 정리할 수 있다. 또한 칭의 교리는 ‘실재적, 본체적(real-ontic)’방식으로 신자의
마음에 내주하는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다.
칭의와 신성화는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의 ‘참여’를 의미. 그리스도는 곧 하나님이기에 하나님
자신에게 참여하는 것. 이 참여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결과이지만, 인간은 스스로의
사랑으로 하나님에게 참여할 수는 없음. 대신, 하나님의 사랑이 인간의 신성화에 작용.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에게 참여하는 것은 하나님이 사랑으로 신자 안에 현존하시는 결과.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하나님, 인간은 여전히 인간.
루터에게 칭의는 ‘은혜’와 ‘선물’로 표현할 수 있음. 은혜는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하심이고,
선물은 그를 의롭게 만드는 것을 의미함. 이러한 점을 생각할 때, 페우라는 루터에게 칭의는
자기 이해의 변화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 혹은 사랑의 새로운 정신이다.
하나님께참여함으로 하나님은 죄인을 존재론적으로 변화시키고, 신적 본질 안에서 죄인은 의로울
뿐만아니라 ‘한 명의 신’이 된다.
루터의 칭의 교리에 나타난 두 종류의 의
첫 번째 의는 외부에서 우리에게 주입된 것으로, 그리스도 자신 안에 존재하는 의로움이자
믿음의 의이다. 이 의가 인간을 의롭게 만들며, 오직 은혜로 주어진다. 이는 법정적 전가 그
이상으로 신자 안에서 그리스도의 의를 실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두 번째 의는 ‘우리의 의’이며, 첫 번째 의의 결과이며, 첫 번째 의를 효력있게 하고 그것을
‘완벽’하게 한다. 그러나, 그 기원과 원천은 그리스도의 의 안에 있다.
그리스도의 의는 무한대이기에 믿음 안에서 현존하는 그리스도는 한 순간에 모든 죄를 흡수.
그러나 완전히 말살되지는 않는다.
그리스도의 현존은 죄의 능력을 무효로 만들고 타락한 본성을 변화시키는 과정의 시작을
의미.
선행의 역할은 동료 인간을 위한 것이며, 구원과는 상관이 없다. 인간은 구원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하나님은 죄인을 무존재(아무도 인간을 하나님의 의에 이르도록
도울 수 없는 상태)로 만드신다. 선생은 그리스도와 신자의 연합과 신자 안에서 그리스도의
실제 현존으로부터 비롯 된다.
종합하면, 그리스도의 현존은 우리 밖에 있을 뿐만아니라 우리 안에 있으며, 이것이 ‘실재적,
본체적’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현존이다. 그리스도는 신자를 신적 본질에 참여시키기 위해
자신을 신자에게 선물로 ‘실제로’ 내어준다.
의롭다 선언하는 것이자 의롭게 만드는 칭의
책을 한번 슥 읽으시는 것이 더 재밌을 겁니다!
개정된 칭의 이해를 위한 근거와 자료들
‘이와 같이 개정된 해석들이 왜 필요한가?’
1. 칭의는 성서에 나타나는 구원에 관한 많은 이미지 가운데 하나일뿐 유일한 핵심이 될
수 없다.
2. 디카이오쉬네는 하나님의 정의를 뜻하며, 바울이 ‘전가’를 사용할 때, 칭의 교리의
정수가 ‘법적 전가’라고 하지는 않았다. 하나의 설명 방법으로 사용하였다.
3. 칭의와 성화는 서로 구별할 수 없다.
4. 유대교와 율법에 대한 기독교의 표준적 해석은 예수와 바울의 가르침에 의거하여
재평가 되어야 한다.
5. 칭의는 새로운 지위이며,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써 하나님과 맺는
새로운 관계이다. 인간과 창조자 사이의 연합을 뜻한다.
6. 칭의는 개인주의적인 것이 아니다. 언약 공동체를 위한 하나님의 구원 목적 및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관련된다.
필자의 주장 몇 가지
1. 루터의 율법과 복음의 대조는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 율법과 복음을 이렇게 구분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통치가 다가왔다는 사실에 근거하는’ 죄의 용서라는 성서적
개념을 희미하게 만들고, 죄의 용서와 하나님의 의의 요구 사이의 관련성을 약화한다.
2. 성령의 사역은 구원의 성취에 있어서 단지 주관적인 것으로만 간주될 수 없다.
아버지가 죽은 자 가운데서 아들을 일으키신 것은 바로 성령을 통해서였으며, 아들을
일으키신 것이 우리로 하여금 칭의에 이르게 한 바로 그 행위다.
비판적 평가와 앞으로의 연구를 위한 과제
1.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구원과 인간 의지의 역할을 다루는 문제. 믿음이라는 개념과
이것이 구원론적인 범주들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에 관한 문제.
2. 헬싱키 학자들이 신성화와 연합이라는 개념을 상당히 자유주의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루터가 연합이라는 용어를 간헐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신성화의 또 다른 핵심으로
언급한다. 그런데 왜!!!! 동방 정교회의 연합 개념과의 밀접성을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냐!
3. ‘실재적, 본체적’연합이라는 용어의 정확한 뜻은 아직 개방된 채로 남아 있다.
4. 바울에 관한 새 관점과 신약성서 연구를 통해 발전된 사항들과 비판적으로 대화하면서
관련된 사항들을 수집하는 것.
5. 루터파 안에 있는 믿음의 수동성 개념과 동방 정교회의 신인협력 개념과의 관계.
● 나(저자)의 의견은
에큐메니즘에 대한 논의는 각 교단의 독특성을 포기하라는 것이 아니다. 또한
여기저기서 조각들을 수집하여 하나로 만들고 더 호소력 있는 혼합물을 만들자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각 교단의 전통이 서로 다름을 명백하게 인정하는 것이고, 서로 다른
강조점들을 가지고 있음에도 하나로 수렴할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공동선언은
칭의 설명에 대한 차이점이 더 이상 교리적 정죄의 이유가 될 수 없음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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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낀점
1. 카르카넨은 '칭의'라는 논제 앞에서 '신성화'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 심도있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는 이 이야기의 장소를 토론의 장이 아닌 커피숍 정도로 착각하는 것 같다는 느낌도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말한 신성화의 개념은 상당히 새롭다. 특별히 인간 본질 안에서 그리스도의 현존이 역사한다는 개념은 신자로 하여금 그 믿음을 더욱 굳건히 해주리라는 기대감도 준다. 그리스도의 현존이 늘 개인 안에서 역사하는 것이 모든 그리스도인의 소망이지 않은가?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현존이 신자 안에서 역사하지 않는 순간의 이유를 들었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대책이 없는 좋은 말은.. 허울뿐이지 않은가..
2. 신성화는 뭐랄까, 송대관과 정대만을 섞어 놓은 느낌. 내 이름은 송대만, 포기를 모르는 네 박자지. 뭐 이런 느낌
3.굴야채신선짬뽕 한 그릇이요!
좋은 것은 다 섞어 놓은 듯한 주장이라고 생각합니다!
등의 의견입니다! 이상입니다.
독함 with 솔라
칭의 논쟁 신성화_벨리_마티 카르카넨
발제자 : 김주성 원우
5.15(화) 목원대학교 신학대학원
목차
1. 김주성 원우의 발제 / 2.느낀점
신성화
각 교단간 관계 회복 가능성의 제기
로마 가톨릭과 루터파의 갈등(칭의교리)
루터파 - 법정적 행위, 의롭다는 선언
로마 가톨릭 - 칭의는 사람을 의롭게 만드는 것
동방 정교회 신성화 개념에 대한 루터파의 답변
1.신성화는 하나님의 영광을 후려치는 것
2.신인협력적 관점의 강요
3.자유의지라는 발상을 옹호하는 것
그러나, ‘칭의와 신성화로서의 구원’(1977)에 나타난 대화를 통해 이러한 갈등을
극복하고자함.
구원의 중요한 두 가지 측면(칭의와 신성화)이 신약성서의 강력한 기반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상당한 일치를 보인다.
만네르마(Mannermaa) 학파는 루터 신학의 새 해석을 제공 -루터 신학의 대안적 읽기-을 통해
러시아 정교회와 핀란드 루터 교회 간의 대화를 낳았다.
새 해석의 기본 논지와 주장의 요약
1. 루터가 구원을 이해한 방식은 칭의 교리의 용어들뿐만 아니라 신성화에 관한
용어들로도 표현될 수 있다.
2. 루터 칭의 주개념은 믿음 안에서 그리스도의 현존이다. 성령을 통해 신자의 마음에
그리스도가 내주하심을 통해 신자가 하나님에게 ‘실재적, 본체적’으로 참여한다.
3. 루터는 법정적이고 유효한 칭의를 구분하지 않고 둘 모두가 칭의라고 했다.
4. 칭의는 성화뿐만 아니라 선한 행위를 포함. 믿음 안에 그리스도의 현존이 그를 한 명의
‘그리스도’로 만들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의는 프로테스탄트(칭의로서 구원)와 동방정교회(신성화로서 구원) 사이의 수렴을
통해 프로테스탄트와 로마 가톨릭 사이 관계의 회복 가능성을 제공한다.
하나님께 참여함 및 신성화로서 칭의
루터의 칭의 교리를 다시 정립하고자 할 때, 루터가 말하는 ‘참된 믿음’은 ‘그리스도가 그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 믿음 안에 현존하고, 이 현존을 통해 그리스도는 믿음의 의와
동일하다.’라고 정리할 수 있다. 또한 칭의 교리는 ‘실재적, 본체적(real-ontic)’방식으로 신자의
마음에 내주하는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다.
칭의와 신성화는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의 ‘참여’를 의미. 그리스도는 곧 하나님이기에 하나님
자신에게 참여하는 것. 이 참여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결과이지만, 인간은 스스로의
사랑으로 하나님에게 참여할 수는 없음. 대신, 하나님의 사랑이 인간의 신성화에 작용.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에게 참여하는 것은 하나님이 사랑으로 신자 안에 현존하시는 결과.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하나님, 인간은 여전히 인간.
루터에게 칭의는 ‘은혜’와 ‘선물’로 표현할 수 있음. 은혜는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하심이고,
선물은 그를 의롭게 만드는 것을 의미함. 이러한 점을 생각할 때, 페우라는 루터에게 칭의는
자기 이해의 변화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 혹은 사랑의 새로운 정신이다.
하나님께참여함으로 하나님은 죄인을 존재론적으로 변화시키고, 신적 본질 안에서 죄인은 의로울
뿐만아니라 ‘한 명의 신’이 된다.
루터의 칭의 교리에 나타난 두 종류의 의
첫 번째 의는 외부에서 우리에게 주입된 것으로, 그리스도 자신 안에 존재하는 의로움이자
믿음의 의이다. 이 의가 인간을 의롭게 만들며, 오직 은혜로 주어진다. 이는 법정적 전가 그
이상으로 신자 안에서 그리스도의 의를 실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두 번째 의는 ‘우리의 의’이며, 첫 번째 의의 결과이며, 첫 번째 의를 효력있게 하고 그것을
‘완벽’하게 한다. 그러나, 그 기원과 원천은 그리스도의 의 안에 있다.
그리스도의 의는 무한대이기에 믿음 안에서 현존하는 그리스도는 한 순간에 모든 죄를 흡수.
그러나 완전히 말살되지는 않는다.
그리스도의 현존은 죄의 능력을 무효로 만들고 타락한 본성을 변화시키는 과정의 시작을
의미.
선행의 역할은 동료 인간을 위한 것이며, 구원과는 상관이 없다. 인간은 구원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하나님은 죄인을 무존재(아무도 인간을 하나님의 의에 이르도록
도울 수 없는 상태)로 만드신다. 선생은 그리스도와 신자의 연합과 신자 안에서 그리스도의
실제 현존으로부터 비롯 된다.
종합하면, 그리스도의 현존은 우리 밖에 있을 뿐만아니라 우리 안에 있으며, 이것이 ‘실재적,
본체적’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현존이다. 그리스도는 신자를 신적 본질에 참여시키기 위해
자신을 신자에게 선물로 ‘실제로’ 내어준다.
의롭다 선언하는 것이자 의롭게 만드는 칭의
책을 한번 슥 읽으시는 것이 더 재밌을 겁니다!
개정된 칭의 이해를 위한 근거와 자료들
‘이와 같이 개정된 해석들이 왜 필요한가?’
1. 칭의는 성서에 나타나는 구원에 관한 많은 이미지 가운데 하나일뿐 유일한 핵심이 될
수 없다.
2. 디카이오쉬네는 하나님의 정의를 뜻하며, 바울이 ‘전가’를 사용할 때, 칭의 교리의
정수가 ‘법적 전가’라고 하지는 않았다. 하나의 설명 방법으로 사용하였다.
3. 칭의와 성화는 서로 구별할 수 없다.
4. 유대교와 율법에 대한 기독교의 표준적 해석은 예수와 바울의 가르침에 의거하여
재평가 되어야 한다.
5. 칭의는 새로운 지위이며,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써 하나님과 맺는
새로운 관계이다. 인간과 창조자 사이의 연합을 뜻한다.
6. 칭의는 개인주의적인 것이 아니다. 언약 공동체를 위한 하나님의 구원 목적 및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관련된다.
필자의 주장 몇 가지
1. 루터의 율법과 복음의 대조는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 율법과 복음을 이렇게 구분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통치가 다가왔다는 사실에 근거하는’ 죄의 용서라는 성서적
개념을 희미하게 만들고, 죄의 용서와 하나님의 의의 요구 사이의 관련성을 약화한다.
2. 성령의 사역은 구원의 성취에 있어서 단지 주관적인 것으로만 간주될 수 없다.
아버지가 죽은 자 가운데서 아들을 일으키신 것은 바로 성령을 통해서였으며, 아들을
일으키신 것이 우리로 하여금 칭의에 이르게 한 바로 그 행위다.
비판적 평가와 앞으로의 연구를 위한 과제
1.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구원과 인간 의지의 역할을 다루는 문제. 믿음이라는 개념과
이것이 구원론적인 범주들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에 관한 문제.
2. 헬싱키 학자들이 신성화와 연합이라는 개념을 상당히 자유주의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루터가 연합이라는 용어를 간헐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신성화의 또 다른 핵심으로
언급한다. 그런데 왜!!!! 동방 정교회의 연합 개념과의 밀접성을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냐!
3. ‘실재적, 본체적’연합이라는 용어의 정확한 뜻은 아직 개방된 채로 남아 있다.
4. 바울에 관한 새 관점과 신약성서 연구를 통해 발전된 사항들과 비판적으로 대화하면서
관련된 사항들을 수집하는 것.
5. 루터파 안에 있는 믿음의 수동성 개념과 동방 정교회의 신인협력 개념과의 관계.
● 나(저자)의 의견은
에큐메니즘에 대한 논의는 각 교단의 독특성을 포기하라는 것이 아니다. 또한
여기저기서 조각들을 수집하여 하나로 만들고 더 호소력 있는 혼합물을 만들자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각 교단의 전통이 서로 다름을 명백하게 인정하는 것이고, 서로 다른
강조점들을 가지고 있음에도 하나로 수렴할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공동선언은
칭의 설명에 대한 차이점이 더 이상 교리적 정죄의 이유가 될 수 없음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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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낀점
1. 카르카넨은 '칭의'라는 논제 앞에서 '신성화'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 심도있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는 이 이야기의 장소를 토론의 장이 아닌 커피숍 정도로 착각하는 것 같다는 느낌도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말한 신성화의 개념은 상당히 새롭다. 특별히 인간 본질 안에서 그리스도의 현존이 역사한다는 개념은 신자로 하여금 그 믿음을 더욱 굳건히 해주리라는 기대감도 준다. 그리스도의 현존이 늘 개인 안에서 역사하는 것이 모든 그리스도인의 소망이지 않은가?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현존이 신자 안에서 역사하지 않는 순간의 이유를 들었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대책이 없는 좋은 말은.. 허울뿐이지 않은가..
2. 신성화는 뭐랄까, 송대관과 정대만을 섞어 놓은 느낌. 내 이름은 송대만, 포기를 모르는 네 박자지. 뭐 이런 느낌
3.굴야채신선짬뽕 한 그릇이요!
좋은 것은 다 섞어 놓은 듯한 주장이라고 생각합니다!
등의 의견입니다! 이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