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달한권_서울모임] - 『아담과 하와의 잃어버린 세계』_두번째 모임_김성혁

김성혁
2018-05-21
조회수 1871

새물결플러스 한달한권세미나 두 번째 시간(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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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과 하와> 두 번째 시간, 처음으로 멤버 네 사람이 다 모였습니다. 멤버들에게 이번 모임을 가지면서, 책 내용을 간단하게 요약해서 정리한 후에 생각을 나누는 시간을 갖자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책이 쉽게 읽을 수 있게 쓰인 책이 아니기 때문에 내용과 개념을 좀 더 명확히 하면 더 활발한 토론이 될 수 있겠다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 책을 총 21장으로 되어 있고, 첫 오리엔테이션 이후에 매일 한 챕터, 매주 7챕터를 읽기로 했습니다. 아래는 명제1부터 명제7까지 제가 정리한 요약본의 요약본을 올려드립니다.


명제1. 창세기는 고대문서다.

창세기는 고대문서이므로, 읽을 때 고대인들이 어떻게 사고했는지, 그리고 그들의 소통의 근간을 이루는 개념이 무엇이었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은 청중에게 말씀하시기 위하여 적합한 의사 전달자를 고용하시는 방식으로 일차적인 청중(성경시대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예언자와 청중은 역사, 문화, 언어, 그리고 동시대적 삶의 경험을 공유한다. 하지만 고대의 의사 전달자와 우리 사이(이차적인 청중)에 존재하는 거리는, 우리가 그들의 말을 오해할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성서에서 하나님의 의도는 과학을 가르치거나 과학적 진실을 드러내시는 것이 아니다. 고대 과학의 일부인 성서 내의 진술들이 마치 현대의 과학적 이해에 대한 하나님의 설명인 것처럼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현대적 개념들을 성서 본문 안으로 집어넣어 읽는다면, 우리는 권위가 우리 자신과 우리의 개념에 있다고 여기면서 성서 본문의 권위를 피하는 것이며 그 결과 이를 훼손하는 셈이다. 성서의 본문은 철저히 고대의 것이며 그 상황 속에서 의사를 전달한다. 고대의 사고와 현대의 사고 사이의 차이를 인식하는 최선의 길은 고대 세계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명제2. 고대 세계와 구약성서에서 창조는 그 초점이 역할과 기능을 부여함으로써 질서를 세우는 일에 맞춰진다.

우리 문화(물질주의/자연주의)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기원의 문제에 관해 생각할 때 물질적 맥락에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고대 세계의 인지 환경은 우리와는 달랐다.

창세기 1:1은 하나님의 실제적인 행동에 관한 서술이라기보다는 문학적 도입절의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실제 이야기는 창세기 1:2부터 시작된다. 창세기1:2에서 우리는 물질(땅과 바다)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고, 세상이 물과 흑암으로 덮여 있었음을 발견한다. 흑암과 바다는 무질서의 상황이다. ‘형태가 없고 공허하며’로 번역되는 “토후tohu 와보후wabohu” 조합은 질서와 목적이 결여되어 있는 상황을 의미한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창조는 물질의 부재가 아니라 질서의 부재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성서 전체에서 ‘창조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동사 “바라bara”는 본질적으로 물질적 존재와 관련되어 있지 않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는 질서를 가져오는 일과 관련이 된다.

하나님의 창조는 ‘분리’와 명명‘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이는 고대 근동의 나머지 지역에서도 주요한 창조 활동이었다. 창세기 1장 본문을 무로부터 어떤 물체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질서와 기능성을 초래하는 것으로 볼 때, 하나님은 단지 우주를 만드신 것이 아니라 우주가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도록 만드셨으며 매순간 그것의 질서를 유지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명제3. 창세기 1장은 물질적 기원이 아닌 기능적 기원에 관한 설명이다.

7일 간의 창조를 통해 이야기의 강조점이 물질보다는 질서 잡힌 환경에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1) 첫째 날 최종적 결과는 낮과 밤이라는 이름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낮과 밤의 교차는 시간의 기원을 구성하는 일에 관해 말한다. 시간은 물질이 아니라 기능이다.

2) 둘째 날은 궁창 위의 물과 아래의 물이 분리 된다. 이 공간은 모든 피조물이 살아가는 공간이 될 것이다. 고대 이스라엘인들의 이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이 공간은 물질적이지 않다.

3) 셋째 날 물이 모이고, 마른 땅이 드러나고, 식물이 자라는 것은 조직화 작업이고 질서를 세우는 일이지 형성 작업이 아니다. 이런 질서를 세우는 것은 식량 생산을 위한 기초를 제공한다.

4) 넷째 날. 고대인들은 태양과 달의 물리적 구성에 관심이 없었고, 질서정연한 인간의 체계 안에서 지정된 역할을 얻는 일의 측면을 논한다.

5) 다섯째 날 ‘그 종류대로’라는 표현은 짐승이 번식하는 일에서도 질서가 우선함을 알리는 진술이다. 모든 기능과 이런 기능을 수행하는 존재들은 인간을 섬기는 일에 비추어 논의된다.

6) 여섯째 날 하나님은 땅을 향해 생물을 생산하라고 명령하신다. 고대인들은 땅이 짐승을 낳는다고 보았다. 온갖 짐승은 서로 다른 역할을 갖고 있으며, 하나님은 인간에게 그런 역할을 식별하고 그것들을 할당하는 과업(명명)을 맡기신다. 여섯째 날의 이야기는 인간이 자신을 위해 질서가 잡혀가고 있던 세상에서 수행할 역할의 문제를 다룬다.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역할과 기능,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정체성, 그분의 대리자로서의 역할을 하는 방법과 관계되어 있다.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이 우리와 맺고자 하시는 관계를 나타낸다. 창세기 본문은 질서와 기능에 대한 관심으로 가득 차 있다. 이는 고대 세계의 우주론들이 기원에 관해 말하는 기본적인 방식이기도 하다. 이는 신학적 주장이며, 자신의 과학적 교양의 수준과 상관없이 이해할 수 있는 주장이다.


명제4.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은 성소로서의 우주에 질서를 부여하신다.

창세기1:1-2:3은 6일이 아니라 7일간의 기원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일곱째 날에는 물질과 관련된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지만, 실제로 일곱째 날은 기원 이야기의 절정이며, 목적이다.

집에 질서를 세우는 이유는 그 작업을 마치고 그곳에서 살기 위해서다. 집에 질서를 세운 후 안식할 때, 그 안식은 편히 쉬는 것이 아니라 질서정연한 공간 안에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안식은 하나님이 7일에만 한 어떤 행동이 아니라, 그 이후 모든 날에 행하고 계신 일이다. 이 안식처는 하나님이 즉위해 앉으신 신전이며, 거처이다.

고대 근동의 어떤 독자로도 이 7일간의 이야기를 훑어본다면 어렵지 않게 그것이 신전/성전 이야기라는 결론을 내릴 것이다. 신전은 하나님의 통치 중심지이며, 하나님이 질서를 유지하고, 명령을 내리고, 통치를 행사하는 관제실이었다. 창세기 1-2장은 물질적 우주의 기원보다는 성소의 기원에 관한 이야기다.


명제5. 하나님이 기능적 질서를 세우실 때 그것은 “좋다.”

‘좋다tob’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다양한 방식으로 번역된다. 종종 해석자들은 세계가 좋은 것이 되기 위해서 고통, 고난, 죽음, 약탈이 없이 완벽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이는 완전이라는 추상적 특성보다는 기능들과 관련된다. 이 단어의 중요한 의미론적 범주는, 무언가가 그것이 설계된 방식대로 기능하고 있음을, 즉 그것이 질서정연한 시스템 안에서 나름의 역할을 하고 있음을 가리킨다. 우리는 이 단어 하나에 기초해서 타락 이전의 세상에는 고통, 고난, 약탈, 죽음 등이 없었다고 추론해서는 안 된다.


명제6. 창세기 1-5장에서 “아담”이라는 단어는 다양한 방식으로 사용된다.

아담이라는 단어는 인간을 의미하는 히브리어이다. 이 이름이 역사적인 이름이 아니라면, 이는 히브리어를 말하는 이들이 특별한 의미를 전달할 의도를 가지고 그들에게 배정한 이름일 것이다(천로역정의 인물 이름처럼).

히브리어는 개인의 이름에 정관사를 사용하지 않으므로, 아담에 정관사the가 붙어 있으면 한 개인의 이름으로 이해할 수 없다. 아담의 호칭은 창세기에서 정관사와 함께 22차례, 전치사와 함께 3차례, 정관사나 전치사 없이 9차례 사용되었다.

창세기 이 장들은 단순히 아담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 남자에 관한 전기적 정보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본문은 하나의 종種으로서의 인간에 관해 이야기한다. 정관사가 사용될 때, 그 지시 대상은 인간의 대표자 역할을 하는 한 개인이다. 이런 대표는 하나의 원형이 되거나 언약적 대표가 된다. 우리는 그가 언약적 대표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명제7. 두 번째 창조 이야기(창2:4-24)는 첫 번째 이야기(창1:1-2:3) 중 여섯째 날의 일에 대한 반복이라기보다 그것의 후속편으로 간주될 수 있다.

창세기 1장과 2장, 이 두 이야기는 하나의 시리즈(창세기 2장은 하나의 후속편)로 읽을 수 있다. 창세기2:4는 두 번째 이야기에 대한 도입 역할을 한다. ‘하늘과 땅의 내력toledot’으로 시작하는데, ‘이것이 ~의 내력이니’라는 문학적 공식은 창세기 이곳과 다른 열 곳에서 나타난다. 다른 모든 곳에서 ~는 사람의 이름이다. 이 논리를 사용해 소개 되고 있는 단락이 7일에 관한 이야기에서 보도된 하늘과 땅의 창조 이후에 일어난,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발전된 일에 관해 이야기하리라고 결론을 내릴 것이다.

이는 우리가 아담과 하와를, 비록 그들이 창세기 1장에서 창조된 사람들 중에 당연히 포함되어 있을지라도, 최초의 부부 혹은 그들 시대의 유일한 사람들이라고 여기는 것이 이 본문에 대한 유일한 읽기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창세기 2장에서의 관심은 이제 막 시작된 지구의 상황으로 향한다(창1:2부터는 막 시작된 우주에 대한 묘사). 바로 이것이 창세기가 2장을 연대기적으로 여섯째 날이 아닌 일곱째 날 뒤에 배치하고 있는 또 다른 이유다.



함께 생각해 본 질문

Q1. 새롭게 깨달은 사실은 무엇인가?

Q2. 가장 잘 수용이 되는 내용과 가장 거부감이 드는 내용은 무엇인가?

Q3. 성경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어떠한 해석 방법을 따르고 있는가?


후기

존 월튼은 고대문헌학과 역사비평, 문학비평 등 다양한 도구를 통해서 성경을 읽고 있습니다. 멤버들이 다양한 신앙적/신학적 배경을 갖고 있어서 이런 부분에 대해서 어떻게 받아들일지가 우려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존 월튼이 아담의 역사성을 옹호하고, 복음주의 계통의 학교에서 신학을 가르치는 복음주의 성경신학자라는 사실이 모든 멤버들에게 어필이 되었습니다.

4명의 멤버 중에 신학을 하지 않은 한 청년이 있는데 시종 어렵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충분히 공감을 합니다. 혹시나 이 책을 접하는 평신도분이 계시다면 학문적으로 함께 고민하고 답변을 해줄 수 있는 목회자와 이런 책모임을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모임 가운데 월튼의 견해를 일단 완전수용을 해보자는 분도 있었고, 약간의 우려를 보이며 성경에 대한 접근을 하는 분도 계셨습니다. 저는 양측의 견해를 다 존중합니다. 일단 저자의 글에 매료되어 깊이 그 생각과 사고를 이해해 보고, 그러고 나서 비판적인 시각으로 책을 다시 한 번 돌아보는 것은 독서자의 기본자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모두가 성경을 정경적으로 읽고, 하나님께서 성경의 저자들에게 영감을 주셨다는 사실을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위에 신학적인 지식을 더하여 갈 것을 다짐하였습니다. 앞으로 남은 두 주간도 책을 읽음으로써 하나님의 마음에 다가가는 시간을 갖고 싶습니다.

(다음 주 모임은 5/22 휴일 관계로 한 주 연기를 하기로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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