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달한권_총신신대원] - 『신학논쟁』_첫번째 모임_김정규

김정규
2018-05-10
조회수 1785

한달한권_신학논쟁_총신신대원_첫 번째(아홉 번째)이야기

첫 번째이자 아홉 번째 모임을 인도하신 하나님께 너무 감사하다.

처음부터 이제까지 참석한 박이삭, 문대성 전도사님

두 번째 책부터 많은 발제도 충실하게 해주고 계신 여러 전도사님들

세 번째 책에 새롭게 참석해 주시 오귀세 목사님(^^-넘 반갑습니다.)

다음 주부터 참석하실 두 분의 전도사님들(이진환, 최수원 전도사님)께 다시금 감사함을 전한다.


신학논쟁은 알미니안이라고 스스로 밝힌 로저 올슨의
기독교의 역사에 남을 다양한 사상가들’을 입문할 수 있는 책이다.

첫 발제는 루돌프 불트만과 판넨베르크의 신앙, 신화, 예수 부활에 관한 논쟁(25)과
키프리안의 교회의 일치에 대한 이야기였다.

불트만을 비판함으로 인기를 얻은 판넨베르크를 등장시킴으로 불트만의 색깔을 진하게 칠하는 과정을 개략적으로 살펴보았다. 논의 중 오귀세 목사님께서는 불트만의 ‘비신화화’과정의 기준이 무엇인지에 대해 질문이 있었고, 이에 보다 깊은 논의가 이어졌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불트만의 해석을 영지주의로 본 판넨베르크의 뜻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불트만의 요한복음을 대상으로 영지주의라고 생각했으나, 다른 것 같았다. 용어정리의 문제인가?

키프리안의 발제는 교회의 일치에 대한 문제였다. 교회일치를 위해 주교의 권세를 강조한 것으로 보였지만, 오늘날의 현실에서 주교(장로교의 목사)의 권위를 강조하는 것에는 반감이 들었다. 그리고 로저 올슨의 알미니안의 색채(?)가 조금 드러난 ‘개신교는 용서가 너무 쉽다’는 그의 견해는 자유의지를 강조하는 그라면 이해가 되는 부분이다.

개신교는 용서가 너무 쉽다는 것은 좋은 지적이다.

하나님의 용서는 치름의 용서다. 그 댓가는 자신이 죽는 것보다 더 컸다. 삼위일체의 신학에서 이점을 살펴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삼위가 어떻게 일체인가? 예수를 죽기까지 내어주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자기자신을 내어줌을 극대화한 표현은 삼위가 일체라는 것으로 다르게 쓰여 인간의 언어와 이해를 넘어서게 되며, 영원의 언어를 말씀과 기도로 만나게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우리에게 죄 지은자를 어떻게 용서하고 있는가?

다음주는 칼 바르트와 에밀 브루너, 슐라이어마허의 ‘신학 방법론’,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의 ‘죄와 구원에 대한 논쟁이 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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