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함 with 솔라
칭의 논쟁- 4. 진보적 개혁파_마이클 F. 버드
발제자 : 옥지현 원우
5.08(화) 목원대학교 신학대학원
목차
1. 옥지현 원우의 발제 / 2. 느낀점
1. 발제
서론.
진보적 개혁파란? (Progressive Reformed)
-신앙생활에서 성서의 최고 권위를 믿는다.
-대체적으로 언약신학의 체계를 따르며, 칼뱅주의적인 구원관을 견지한다
- 1619년 발표된 도르트 신조에 따르면 칼뱅주의 구원관은 5가지 명제로 구성된다.
- Total Depravity(전적 타락): 인간은 '구원에 관한 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 Unconditional Election(무조건적 선택): 하나님께서는 만세 전(정확한 시기에 대해서는 칼뱅주의도 크게 둘로, 즉 타락 전 선택과 타락 후 선택으로 나뉜다)에 구원하실 자와 유기할 자를 택하셨다.
- Limited Atonement(제한 속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오직 택자만을 위해 속죄의 피를 흘리셨다.
- Irresistible Grace(거부할 수 없는 은총):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시어 은총을 베푸실 때 인간은 이를 거부할 수 없다.
- Perseverance of the Saints(성도의 견인):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다.
- 위의 5대 교리를 이니셜만 따서 튤립(TULIP) 교리라고 부른다.
-성서의 요약적 진술로서 오류가 있을지라도 개혁파 신앙고백을 좋게 여긴다.
-교회가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면 교회를 향한 주해적·신학적 도전의 국면에서 당신의 전통이 지닌 진실성을 단순히 재진술하는 것은 소용이 없다. 우리는 반드시 “모든 내용을 시험해야”하며(살전 5:21), 만약 우리의 전통이 성서와 맞지 않다면 그것은 기꺼이 수정되어야한다.
기족 개혁파 신학자들이 일반적으로 구원사를 도외시한 채 신학적으로 구원 서정에 얽매여 바울을 해석해왔다고 생각한다.
-개혁파의 바울 해석의 대부분은 사회적으로 현실성이 없다. 개혁파 전통 안에는 바울을 읽을 수 있는 많은 양의 훌륭한 자원이 있다고 생각한다.
-> 칼뱅과 루터의 저작에 진정한 바울주의가 스며들어있다,
-> 개혁파가 자주 사용하는 오직 은혜가 바울 신학의 중심사상을 선언한다.
-> 인간은 유효한 은혜가 지극히 필요한 피조물이다.
-> 하나님은 의인이 아닌 경건치 못한 자를 의롭다고 선언한다. (이 점이 성서신학의 규율을 제공했다)
-> 하나님의 구원계획의 통일성과 이스라엘과 교회의 연속성을 정확히 강조한다.
= 칭의는 새 시대를 여는 첫 관문이다, 하나님이 새 언약을 통해 새로운 지위를 획득한 새로운 백성을 창조하는 행위이다.
갈라디아서와 로마서 안에서 본 이신칭의.
바울과 하나님의 구원(갈라디아서)
갈라디아서에서 “이신칭의의 복음”은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의 복음”의 한 목록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바울과 하나님의 의(로마서)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구원 행위에서 구체화되고 제정된 하나님의 성품이며,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무죄를 입증하고 사악한 자를 정죄하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의 의는 복음이 아니지만, 복음 안에서 드러난 어떤 것이다. ‘하나님의 의’는 이신칭의가 아니다. 하나님의 의는 로마서의 모든 본문 안에 있는 칭의, 구속, 희생, 죄 용서, 언약의 구성원 됨, 화해, 성령의 선물, 새로운 순종의 능력, 그리스도와의 연합, 죄로부터의 자유, 종말론적 신원을 포함하는 구원이라는 총체적 선물 꾸러미로 소개된다.
-제임스 던이 언급한 것처럼 “‘하나님의 의’는 그 어디에서도 하나님의 단일한, 단 한 번의 행위로 인식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하나님의 받아주심, 견인하심, 그리고 마지막 때에 신원하시는 은혜로 인식된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함으로 축소되지 않는다.
전가.
개혁파의 표준견해는 율법에 대한 예수의 순종이 신자들의 의의 기반으로서 그들에게 전가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율법 순종의 전가는 신자들을 적극적으로 의롭게 하는 반면에, 칭의는 소위 백지상태로 되돌리는 죄 용서로 구성된다.
1. 예수의 순종은 엄청나게 중요하며, 이것이 없으면 구원받을 사람이 하나도 없다.
-예수의 순종이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된 이스라엘과 인류를) 구속할 수 있는 희생물이 될 자격을 그에게 부여했다. 신약성서는 그의 수동적인 순종, 즉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통한 그의 순종을 강조한다.
2. 로마서 4장은 개혁파의 전가 이해를 확립하기 위한 어떤 증거도 제시하지 않는다.
로마서 4장에 나타난 네 종류의 “여겨짐”
1) 일하는 자에게는 그의 삯이 선물이 아니라 보수로 여겨진다.(롬4:4)
2) 또한 죄로 여기지 않음이 존재하는데, 이는 용서의 다른 면이다.(롬4:7-8)
3) 매우 중요한 것은 “믿음이 의로 여겨졌다”는 것이다.(롬4:3,5,9,22,24)
4) 그리고 믿는 자가 “의로 여겨졌다”.(롬4:6,11)
-> 바울은 로마서 3:28의 “의롭게 되다”를 로마서 4:6에서 “의로 여기다”로 바꾸었다. 따라서 바울이 “하나님이 의로 여기다”라고 말할 때, 그는 단지 “하나님이 의롭게 하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이 “의”는 “그리스도의 의”와 관련된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3. 다수의 본문이 의의 전가를 옹호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4. 하나님이 예수를 의롭다 하셨다.
= 전가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 안에 있는 그의 순종과 의로움에 참여하고 결합된다고 표현하는 것이 성서적인 진술이 될 것이다.
- 톰 라이트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일반적으로 전가에 부여된 책무를 실제로 행하기까지 한다고 말한다.
행위에 의한 칭의에 관한 바울과 야고보의 견해
바울과 야고보의 주장은 모순되지 않는다.
1. 바울과 야고보는 단어를 똑같은 의미로 사용하지 않았다.
2. 선한 행위가 정말로 선하고 구원에 필요하다는 것을 반드시 강조해야 한다.
= 아버지 하나님은 마지막 심판에서 우리를 흠 없고 칭찬받을 만하게 하시려고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우리 안에서 자신의 일을 행하신다. 그날에 십자가와 부활에서 우리를 향해 선포되는 하나님의 판결은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믿음의 삶을 통해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행위와 동등하다.
의롭다 칭하시고 의롭다 여김 받으시는 하나님.
칭의에는 다섯 개의 핵심 측면이 있다.
칭의는 법정적 개념이며, 도덕적 상태가 아니다.
칭의는 마지막 심판의 판결이 지금 선언되었다는 점에서 종말론적이다. 그 판결은 무죄이고, 그리스도와 성령의 지속적인 사역에 의해 보증된다.
칭의는 아브라함 언약의 약속을 확증한다. 유대인, 헬라인, 야만인의 정체성을 하나님의 백성의 온전하고 동등한 구성원으로 확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칭의는 언약적이다.
칭의는 도덕적 성화가 칭의에 포함될 수 없는 한 유효하지만, 칭의와 도덕적 성화는 절대적으로 분리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칭의는 “의롭다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기에 삼위일체론적이다.
2. 느낀점
1. 진보적 개혁파에 대한 자신의 의견 / 2. 독함 모임하면서 느낀점
-j성
1. 우선, '진보적 개혁파'라는 이름이 그들에게는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방어의 수단으로 작용이 되는 것 같다. 어느 진영에서 취사선택을 해도 되니. 버드가 주장하는 칭의에 대한 내용은 크게 흠잡을 것이 없지만, 크게 동의되지도 않는 느낌이었다. 무언가 섞여서 나온 색이 아닌 그들 고유의 색을 보여줬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예수가 하나님의 칭의를 받았다는 주장은 참으로 놀랍다. 그들에게 예수는 무엇인지 의심된다. 성자 하나님인가? 혹은 롤 모델인가?
2. 잠깐 곁길로 가자면, 독함 모임이 좋은 이유는 지식의 나눔에만 있지 않다. 그 안에서 함께 웃으며 느껴지는 행복이 있기에 독함 모임은 참 좋다.
또한, 시간이 지날수록 신학적 사유가 더 잘 이루어져서 좋다. '신학을 한다'는 것이 이런 느낌인가 싶다.
-j현
1. '의롭다하시는 분은 하나님'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인류를 구속할 수 있는 희생물의 자격을 스스로에게 부여했으며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의롭다고 하셨다는 그 사실이 매우 놀랍다. 칭의, 놀랍고 놀라운 오 칭의. 우리 서로 의롭다 칭해주는 시간을 갖자.
2. 독함의 궁극적 목표는 '행복'을 첫째로 둘 것이며, 이 행복으로 국가의 안녕과 세계의 평화에 이바지함을 목표로 한다.
-k백
1. j성이형의 말대로 진보적 개혁파의 칭의 주장은 특별히 강한 자기들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순종함으로 희생물이 된 점, 그밖에 지속적으로 논의되어 왔던 ‘그리스도의 믿음’에 대한 논의가 기억에 남습니다..????
2. 한 주씩 지나면서 각 학파의 칭의 의견을 듣고 있는데, 그 의견들의 많은 부분을 이해하고 있진 못하지만 각 학파 간의 차이점을 비교하고 생각해보는 시도를 해보고 있습니다.(스스로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용..ㅎㅎ)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들이 많지만 신학적인 사고를 조금씩 넓혀가는 시간이 되고 있눈 것 같습니다????????
-b진
1. 보수적 개혁파와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다른 개념을 이야기 하지만 때론 마음에 드는 내용들도 있었다.
'행위에 의한 칭의에 관한 바울과 야고보의 견해'를 같은 의미로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서 동의 하면서도 반문을 갖게 만들었다.
2. 아직도 어렵습니다요... 그래서 각자의 파트를 준비하시는 모습을 보며 배워갑니다. 좋아요~~!
-p수
1. 보수적 개혁파와 새관점의 가운데 있는 느낌이다. 결국 칭의는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에 동의. 그리고 언약적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조금더 깊이 나누고 싶은 생각이 든다. 그리고 논평에 어떤 학자의 말대로, 삼위일체론적 하나님의 칭의론에 대해서 조금더 이야기해줬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 칭의는 새 시대를 여는 첫 관문이다. 하나님이 새 언약을 통해 새로운 지위를 획득한 새로운 백성을 창조하는 행위"(몇 페인지 궁금하신분은 찾아 보시길)라는 저자의 이 표현이 참 마음에 든다.
2. 함께 독서를 나누는 것 자체가 득이 된다. 살아온 삶과 생각의 가치관이 다르다 보니 보는 시각이 조금씩은 다르다. 그런 것들을 함께 이야기하면서 나누는 이야기와 나눔을 통해 나의 가치관도 조금씩 변해가고 어떻게 이야기해야 사람들에게 쉽게 설명할 수 있을지를 알아가는 것 같다. j현의 말대로 결국 독서가 행복으로 가는 길이 되길 원한다.

독함 with 솔라
칭의 논쟁- 4. 진보적 개혁파_마이클 F. 버드
발제자 : 옥지현 원우
5.08(화) 목원대학교 신학대학원
목차
1. 옥지현 원우의 발제 / 2. 느낀점
1. 발제
서론.
진보적 개혁파란? (Progressive Reformed)
-신앙생활에서 성서의 최고 권위를 믿는다.
-대체적으로 언약신학의 체계를 따르며, 칼뱅주의적인 구원관을 견지한다
-성서의 요약적 진술로서 오류가 있을지라도 개혁파 신앙고백을 좋게 여긴다.
-교회가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면 교회를 향한 주해적·신학적 도전의 국면에서 당신의 전통이 지닌 진실성을 단순히 재진술하는 것은 소용이 없다. 우리는 반드시 “모든 내용을 시험해야”하며(살전 5:21), 만약 우리의 전통이 성서와 맞지 않다면 그것은 기꺼이 수정되어야한다.
기족 개혁파 신학자들이 일반적으로 구원사를 도외시한 채 신학적으로 구원 서정에 얽매여 바울을 해석해왔다고 생각한다.
-개혁파의 바울 해석의 대부분은 사회적으로 현실성이 없다. 개혁파 전통 안에는 바울을 읽을 수 있는 많은 양의 훌륭한 자원이 있다고 생각한다.
-> 칼뱅과 루터의 저작에 진정한 바울주의가 스며들어있다,
-> 개혁파가 자주 사용하는 오직 은혜가 바울 신학의 중심사상을 선언한다.
-> 인간은 유효한 은혜가 지극히 필요한 피조물이다.
-> 하나님은 의인이 아닌 경건치 못한 자를 의롭다고 선언한다. (이 점이 성서신학의 규율을 제공했다)
-> 하나님의 구원계획의 통일성과 이스라엘과 교회의 연속성을 정확히 강조한다.
= 칭의는 새 시대를 여는 첫 관문이다, 하나님이 새 언약을 통해 새로운 지위를 획득한 새로운 백성을 창조하는 행위이다.
갈라디아서와 로마서 안에서 본 이신칭의.
바울과 하나님의 구원(갈라디아서)
갈라디아서에서 “이신칭의의 복음”은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의 복음”의 한 목록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바울과 하나님의 의(로마서)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구원 행위에서 구체화되고 제정된 하나님의 성품이며,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무죄를 입증하고 사악한 자를 정죄하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의 의는 복음이 아니지만, 복음 안에서 드러난 어떤 것이다. ‘하나님의 의’는 이신칭의가 아니다. 하나님의 의는 로마서의 모든 본문 안에 있는 칭의, 구속, 희생, 죄 용서, 언약의 구성원 됨, 화해, 성령의 선물, 새로운 순종의 능력, 그리스도와의 연합, 죄로부터의 자유, 종말론적 신원을 포함하는 구원이라는 총체적 선물 꾸러미로 소개된다.
-제임스 던이 언급한 것처럼 “‘하나님의 의’는 그 어디에서도 하나님의 단일한, 단 한 번의 행위로 인식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하나님의 받아주심, 견인하심, 그리고 마지막 때에 신원하시는 은혜로 인식된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함으로 축소되지 않는다.
전가.
개혁파의 표준견해는 율법에 대한 예수의 순종이 신자들의 의의 기반으로서 그들에게 전가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율법 순종의 전가는 신자들을 적극적으로 의롭게 하는 반면에, 칭의는 소위 백지상태로 되돌리는 죄 용서로 구성된다.
1. 예수의 순종은 엄청나게 중요하며, 이것이 없으면 구원받을 사람이 하나도 없다.
-예수의 순종이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된 이스라엘과 인류를) 구속할 수 있는 희생물이 될 자격을 그에게 부여했다. 신약성서는 그의 수동적인 순종, 즉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통한 그의 순종을 강조한다.
2. 로마서 4장은 개혁파의 전가 이해를 확립하기 위한 어떤 증거도 제시하지 않는다.
로마서 4장에 나타난 네 종류의 “여겨짐”
1) 일하는 자에게는 그의 삯이 선물이 아니라 보수로 여겨진다.(롬4:4)
2) 또한 죄로 여기지 않음이 존재하는데, 이는 용서의 다른 면이다.(롬4:7-8)
3) 매우 중요한 것은 “믿음이 의로 여겨졌다”는 것이다.(롬4:3,5,9,22,24)
4) 그리고 믿는 자가 “의로 여겨졌다”.(롬4:6,11)
-> 바울은 로마서 3:28의 “의롭게 되다”를 로마서 4:6에서 “의로 여기다”로 바꾸었다. 따라서 바울이 “하나님이 의로 여기다”라고 말할 때, 그는 단지 “하나님이 의롭게 하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이 “의”는 “그리스도의 의”와 관련된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3. 다수의 본문이 의의 전가를 옹호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4. 하나님이 예수를 의롭다 하셨다.
= 전가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 안에 있는 그의 순종과 의로움에 참여하고 결합된다고 표현하는 것이 성서적인 진술이 될 것이다.
- 톰 라이트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일반적으로 전가에 부여된 책무를 실제로 행하기까지 한다고 말한다.
행위에 의한 칭의에 관한 바울과 야고보의 견해
바울과 야고보의 주장은 모순되지 않는다.
1. 바울과 야고보는 단어를 똑같은 의미로 사용하지 않았다.
2. 선한 행위가 정말로 선하고 구원에 필요하다는 것을 반드시 강조해야 한다.
= 아버지 하나님은 마지막 심판에서 우리를 흠 없고 칭찬받을 만하게 하시려고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우리 안에서 자신의 일을 행하신다. 그날에 십자가와 부활에서 우리를 향해 선포되는 하나님의 판결은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믿음의 삶을 통해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행위와 동등하다.
의롭다 칭하시고 의롭다 여김 받으시는 하나님.
칭의에는 다섯 개의 핵심 측면이 있다.
칭의는 법정적 개념이며, 도덕적 상태가 아니다.
칭의는 마지막 심판의 판결이 지금 선언되었다는 점에서 종말론적이다. 그 판결은 무죄이고, 그리스도와 성령의 지속적인 사역에 의해 보증된다.
칭의는 아브라함 언약의 약속을 확증한다. 유대인, 헬라인, 야만인의 정체성을 하나님의 백성의 온전하고 동등한 구성원으로 확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칭의는 언약적이다.
칭의는 도덕적 성화가 칭의에 포함될 수 없는 한 유효하지만, 칭의와 도덕적 성화는 절대적으로 분리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칭의는 “의롭다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기에 삼위일체론적이다.
2. 느낀점
1. 진보적 개혁파에 대한 자신의 의견 / 2. 독함 모임하면서 느낀점
-j성
1. 우선, '진보적 개혁파'라는 이름이 그들에게는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방어의 수단으로 작용이 되는 것 같다. 어느 진영에서 취사선택을 해도 되니. 버드가 주장하는 칭의에 대한 내용은 크게 흠잡을 것이 없지만, 크게 동의되지도 않는 느낌이었다. 무언가 섞여서 나온 색이 아닌 그들 고유의 색을 보여줬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예수가 하나님의 칭의를 받았다는 주장은 참으로 놀랍다. 그들에게 예수는 무엇인지 의심된다. 성자 하나님인가? 혹은 롤 모델인가?
2. 잠깐 곁길로 가자면, 독함 모임이 좋은 이유는 지식의 나눔에만 있지 않다. 그 안에서 함께 웃으며 느껴지는 행복이 있기에 독함 모임은 참 좋다.
또한, 시간이 지날수록 신학적 사유가 더 잘 이루어져서 좋다. '신학을 한다'는 것이 이런 느낌인가 싶다.
-j현
1. '의롭다하시는 분은 하나님'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인류를 구속할 수 있는 희생물의 자격을 스스로에게 부여했으며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의롭다고 하셨다는 그 사실이 매우 놀랍다. 칭의, 놀랍고 놀라운 오 칭의. 우리 서로 의롭다 칭해주는 시간을 갖자.
2. 독함의 궁극적 목표는 '행복'을 첫째로 둘 것이며, 이 행복으로 국가의 안녕과 세계의 평화에 이바지함을 목표로 한다.
-k백
1. j성이형의 말대로 진보적 개혁파의 칭의 주장은 특별히 강한 자기들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순종함으로 희생물이 된 점, 그밖에 지속적으로 논의되어 왔던 ‘그리스도의 믿음’에 대한 논의가 기억에 남습니다..????
2. 한 주씩 지나면서 각 학파의 칭의 의견을 듣고 있는데, 그 의견들의 많은 부분을 이해하고 있진 못하지만 각 학파 간의 차이점을 비교하고 생각해보는 시도를 해보고 있습니다.(스스로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용..ㅎㅎ)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들이 많지만 신학적인 사고를 조금씩 넓혀가는 시간이 되고 있눈 것 같습니다????????
-b진
1. 보수적 개혁파와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다른 개념을 이야기 하지만 때론 마음에 드는 내용들도 있었다.
'행위에 의한 칭의에 관한 바울과 야고보의 견해'를 같은 의미로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서 동의 하면서도 반문을 갖게 만들었다.
2. 아직도 어렵습니다요... 그래서 각자의 파트를 준비하시는 모습을 보며 배워갑니다. 좋아요~~!
-p수
1. 보수적 개혁파와 새관점의 가운데 있는 느낌이다. 결국 칭의는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에 동의. 그리고 언약적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조금더 깊이 나누고 싶은 생각이 든다. 그리고 논평에 어떤 학자의 말대로, 삼위일체론적 하나님의 칭의론에 대해서 조금더 이야기해줬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 칭의는 새 시대를 여는 첫 관문이다. 하나님이 새 언약을 통해 새로운 지위를 획득한 새로운 백성을 창조하는 행위"(몇 페인지 궁금하신분은 찾아 보시길)라는 저자의 이 표현이 참 마음에 든다.
2. 함께 독서를 나누는 것 자체가 득이 된다. 살아온 삶과 생각의 가치관이 다르다 보니 보는 시각이 조금씩은 다르다. 그런 것들을 함께 이야기하면서 나누는 이야기와 나눔을 통해 나의 가치관도 조금씩 변해가고 어떻게 이야기해야 사람들에게 쉽게 설명할 수 있을지를 알아가는 것 같다. j현의 말대로 결국 독서가 행복으로 가는 길이 되길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