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마드 교회>
강릉 노마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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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마드 교회 7-8장 발제 : 장재혁 목사)
7장 하나님 나라의 회복
하나님의 동역자들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세워지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도하에 이루어진다. 하지만 성경은 “인간”의 역할도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구약성경도 각 권마다 중요한 인물들을 소개하고 있다. 모세오경에서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도구로서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신다(출3:10). 하지만 모세는 자신을 사용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부름에 따른 중압감으로 인해 자신은 적합하지 못하다고 말한다(출3:11). 그는 이 말을 하며 “내가 누구이기에”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이 표현은 하나님의 소명에 대한 거절의 표현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예상 밖의 대답을 하신다.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출3:12) 이것은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일은 모세의 능력과는 무관하다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는 것은 그 사람이 누구인지 여부에 달린 것이 아니라, 누가 함께하는지가 중요하다. 하나님께서는 모세 이후에 여호수아를 사용하신다. 이때에도 여호수아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하나님의 계획에 순응하고 순종하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이 만나 대화를 나누다 보면 “교회”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나온다. 그런데 자신이 다니는 교회의 규모에 따라 말하는 사람의 태도가 다른 것을 느낄 수 있다. 자신이 ‘대형교회’를 다니면 은근히 우쭐하고, ‘개척교회’를 다니면 왠지 주눅 들고 위축 되는 듯하다. 또한 신학교나 교회 안에서도 신분 체계가 존재하는 듯하다. 예를 들면, 목사 자녀, 장로 자녀, 권사 자녀, 집사 자녀, 혼자 믿은 사람 순이다. 이러한 자신의 교회의 규모나 교회 내 부모의 직분은 전부 환경적인 요인일 뿐이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이런 환경적인 요인을 자신의 능력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과연 자신의 나라를 세우는데 이런 환경적인 요인(세속적인 능력)을 사용하실까? 앞에서 살펴본 바에 의하면 신분과 환경이 말해주는 능력은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것과는 무관하다. 하나님은 다윗을 선택하실 때 “외모”를 보지 않으셨다. 성경은 일관되게 하나님이 “외모”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으신다고 말한다. 성경에서 중시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그와 함께하시는가의 여부다. 하나님 나라는 신분과 능력을 초월해 오히려 겸손한 자세로 하나님과 함께하는 자들의 것이다. 하나님은 그런 자들을 귀히 쓰시는 분이다.
나사렛 예수
신약 시대에 접어든 후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당신의 통치 질서를 이 땅에 구현하신다. 그리고 새로운 이스라엘 공동체인 제자들을 선별하셨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그 당시 종교 지도자들과 비교했을 때, 그들의 출신 성분은 부족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예루살렘 종교 지도자들이 아닌 제자들의 마음의 밭에 심겼고 바로 이것이야말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는 출신과 배경을 뛰어넘은 나라다. 오히려 저주의 상징인 십자가를 통해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였고, 가장 천한 동네 출신들이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가져온 참된 일꾼임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의 회복은 큰 교회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하는 교회를 통해 이루어진다.】
8장 가나안에 꽃피는 하나님 나라
하나님 나라의 모델로 제시된 에덴은(창1-2장) 인간에 의해 파괴되었고(창3장), 이후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 “가나안” 땅을 중심으로 하나님 나라를 “회복”하신다.
우리는 애굽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통치 질서가 살아 있는 나라를 세우기 위해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서 비롯된 “민족인”인 이스라엘을 애굽 땅에서 부르신다. 하지만 그들에게서는 하나님 나라의 질서와 통치 체계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뼛속 깊이 애굽의 “종”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바로의 “노예”였던 이스라엘 민족을 건져내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신 뒤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질서 속으로 인도하신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은 뼛속 깊이 사탄의 종노릇하던 우리를 구하여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신 것이다.
애굽의 나라에서 하나님 나라로
하나님과 이스라엘 민족은 출애굽기 19-24장에 걸쳐 시내산 “계약”을 맺게 된다. 이 계약에 보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조건이 있는데, 그것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이다.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 왕의 노예였지만 이제 새로운 왕과 계약을 맺고 새로운 옷을 입었으므로 새로운 “통치” 체계를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함을 의미한다. 이스라엘은 민족은 단순히 영적인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들의 “왕”이 바뀌고 “나라”가 바뀐 것이기 때문에 새로운 통치 체제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구원은 실질적으로 소속된 나라와 통치자가 바뀌는 것을 의미한다.
노예에서 자유인으로
해외여행을 가면 낯선 환경과 문화에 적응하기까지는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하다. 나름대로 준비를 해 가더라도 문제는 “지식”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습관”이다. 몸에 밴 “습관”으로 인해 금방 그 문화에 적응하는 것이 쉽지 않다.
이스라엘 민족 역시 그러했을 것이다. 그들은 약 430년 동안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했고, 어느 날 예상하지 못한 갑작스러운 해방을 맞이했다. 이성적으로는 새로운 나라의 백성이 되었음을 이해하고 새로운 왕을 섬겼을지 모르나 그들에게는 여전히 “애굽”에서의 습관이 뿌리 깊게 남아 있었을 것이다. 때문에 이스라엘은 낯선 환경에 처할 때마다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하소연을 하게 된다.
그런데 그들이 뼛속 깊이 노예가 된 이유는 그들 자신이 “자유”보다 “안정(생존)”을 더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유”와 “인간다움”에 대해 생각해볼 시간과 여유조차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이스라엘의 모습이 오늘날을 살아가는 청년들의 모습과도 오버랩된다. 이 땅의 청년들과 인생이 목적이 “생존” 자체에 달려 있었던 이스라엘 민족은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인생의 목적은 떡이 아니다
하나님은 뼛속까지 노예로 전락한 이스라엘 민족을 “자유인”으로 만들기 위해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잎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알게 하려” 하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인생의 목적과 삶의 방식을 바꿀 것을 요구하셨다. 이는 인간의 삶의 이유가 “떡”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의 삶을, “떡”을 위한 인생에서 “말씀”을 위한 인생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음식”으로 훈련시키셨다. 그 방식은 “먹을 만큼만” 거두기(출16:16), 다름 아닌 “일용할 양식 구하기”였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였다. 떡을 목적으로 살아가던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는 기도를 알려주셨다. 이를 통해,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자”와 “염려하면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마6:31)를 읊어대는 자를 대조하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구해야 할 것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이것이야 말로 제자들의 삶의 궁극적인 목적임을 알려주신 것이다. 당시나 지금이나 “떡”을 포기하기 힘들지만,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의 백성은 떡보다 중요한 것을 발견할 줄 알아야 한다.
【가난에서 탈출하는 방법은 가상화폐나 주식 투기로 대박이 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함으로써 진정한 만족을 얻는 것이다.】

(노마드 교회 9-10장 발제 : 주석환 목사)
9장 피라미드 사회에 역행하는 하나님 나라
피라미드 사회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하면서 목격하고 체험한 사회질서는 철저한 계급과 위계질서로 이루어진 이른바 “피라미드 질서였다. 피라미드의 가장 밑바닥에서 쉼 없이 일하는 자신들과 최상층에서 삶을 즐기는 애굽 귀족들 간에는 견고한 신분의 사다리가 존재했고 이스라엘 민족은 그들과 자신들을 비교하며 신세를 한탄했을 것이다.
어쩌면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해방되었을 때 그들이 세우게 될 나라가 애굽과 비슷할 것이라고 기대했을지 모른다.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민족은 아주 당연하게 초강대국인 “애굽”을 자신들 나라의 모델로 삼았다. 예전과 다른 점 한 가지, 자신들은 최상층이 되고 그 땅의 원주민들이 피라미드 하단부에서 자신들을 위해 일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사회 질서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의 왕이자 신이신 하나님이 계획하신 나라는 피라미드적인 사회 경제 구조와는 한참 거리가 먼 것이었다. 그 나라는 계급 질서를 통해 또 다른 애굽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사회 질서를 백성들에게 제시했다.
① 하나님 나라는 차별없이 “쉼”의 혜택을 부여한다.
② 하나님 나라는 나그네를 노예로 삼는 것이 아니라 대접하는 나라다.
③ 하나님 나라는 노예를 부리는 나라가 아니라 “자유”를 선포하는 나라다.
④ 하나님 나라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않는다.
⑤ 하나님 나라는 타국인을 차별하지 않는다.
⑥ 하나님 나라는 외모와 실력으로 땅을 부여하지 않는다.
⑦ 하나님 나라는 회생의 기회를 부여하는 나라다.
하나님 나라의 사회에 대한 구상과 설계는 애굽의 피라미드식 지배가 아닌 구성원들 상호 간에 아끼고 배려하는 것을 근간으로 한다. 하나님은 “평등”과 “자유”가 살아 있고 서로를 위하는 공동체적 배려가 넘치는 사회를 계획하셨다. 그리고 이러한 “평등”은 하나님의 의도하신 본래의 창조 질서와도 크게 다르지 않다.
[ 이 시대의 피라미드에 역행하는 교회는 주방에서 남녀가 함께 일하는 교회다.]
10장 브레이크 없는 세상과 하나님 나라의 제동장치
멈추지 않는 버스
우리는 브레이크가 고장난 대한민국이란 버스에서 “사고”가 나기만을 무기력하게 기다리고 있는 모양새다. 이 나라에서 버티고 견디면 더 나은 미래가 올 것이라며 희망을 갖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 큰 빚과 빈곤이 기다린다는 가혹한 현실은 우리에게서 꿈을 빼앗고 우리를 무기력하게 만들어버린다.
그런데 하나님이 통치하고자 의도하신 이스라엘은 달랐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나라 역시 사회문제와 빈곤을 완전히 막지는 못했다. 물론 하나님은 여러 가지 제도를 통해 공정한 분배가 이루어지게 의도하셨지만 현실적으로 그런 제도가 인간 사회의 불의한 현상을 완전히 막지는 못했다.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는 개인주의보다는 공동체성을 강조한다. 더불어 사는 삶,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기초다.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에서는 이처럼 개인의 윤리에 기대어 극복할 수 없는 양극화 문제에 대한 해법을 “법”으로 제정해 이스라엘이 애굽화하는 것을 막았다. 그 제도가 바로 “희년”이다. 희년 법은 브레이크가 고장난 버스를 세울 수 있는 “마지막 보루”라고 할 수 있다.
토지는 하나님의 것
성경은 사회 양극화로 인한 불평등과 부의 분배, 지대 추구의 삶에 대해 침묵하는가? 오히려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는 빈곤이 없는 “유토피아”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하나님은 당신이 통치하시는 나라에도 “빈곤”의 문제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성경은 빈곤의 문제가 없는 나라에 대해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하면”이라는 조건을 제시한다.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의 양극화 및 빈곤의 문제는 사람의 순종에 달려 있다. 실제로 성경은 양극화와 빈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개인의 경제 생활을 단속하고 분배와 관련된 사회법을 제정하도록 명령한다.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의 빈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첫 번째로 강조되는 것은 개인의 “나눔”정신이다. 두 번째 해결 방법은 사회법을 통해 강제 분배를 시행하는 것이다.
희년과 하나님 나라
마지막으로 하나님 나라에서 양극화 현상을 막기 위한 가장 급진적 제도는 안식년 중 대안식년 격인 “희년”제도다.
희년은 불평등과 양극화를 막기 위한 마지막 제동장치라고 볼 수 있다. 희년 제도의 핵심 규칙은 빚의 탕감과 노예 해방, 땅의 회복이다.
하나님은 자신이 통치하는 나라에서 정의와 공의가 시행되기를 원하셨다.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는 계급과 신분에 차별이 있는 나라가 아니라 구성원 모두가 평등한 나라이며, 가난하게 태어났고 기회가 박탈되는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균등한 기회가 주어지는 나라다. 또 사회적 약자를 위해 적절한 사회법이 제정되고 지켜지는,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세상이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다.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 나라, 즉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는 “종교”가 아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 운동은 종교 운동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는 주일에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만 부르면 성립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는 사회 ,정치, 경제, 문화를 포함하는 “나라” 그 자체이며 우리 일상 그 자체여야 한다.]
또한 불평등한 세상에 평등을 이루고 전쟁과 탐욕이 가득한 세상에 평화를 만드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진정한 역할이다.

(노마드 교회 11-13장 발제 : 김명석 목사)
노마드 교회 11장 : 하나님 나라와 자본
피할 수 없는 자본주의
현재 우리는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시스템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자본주의 시스템은 경쟁심과 불안이라는 인간의 심리를 이용해 작동한다. 청년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낙오되지 않기 위해서 끝없는 경쟁에 뛰어든다. 급변하는 세상을 쫓기 위해 청년들은 부단히 노력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본이다. 자본을 얼마나 소유하느냐에 따라 사람의 등급을 매기고 그것을 행복의 척도로 삼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면서 자본에서 완전히 독립된 공동체를 만드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하나님 나라의 경제 제도
이스라엘 민족에게 40년 동안 수렵, 채취의 방식으로 이스라엘 민족에게 양식을 공급하셨다. 자신들의 신에게 완전히 기댄 채 양식을 해결해야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농업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인 “물”을 관리하는 독특한 방식을 제안하셨다. “내 규례와 계명을 준행하면 철 따라 비를 주리니....(레 26:3-4)”
하나님은 순종 여부에 따라 계절에 맞추어 비를 주겠다고 약속하셨다. 농업에서 가장 중요한 “비”를 기다리라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막연히” 기다리는 것은 발전을 위해 좋은 방법이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발전하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경쟁하고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에서는 순종을 조건으로 “기다림”이라는 막연한 방법을 요구한다. 하나님 나라의 시스템에서 비를 기다리는 문화는 매우 중요한 가치임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에서 “잉여 자원”은 축적이 아니라 “분배”를 목표로 한다.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의 백성은 자신의 수확물의 십분의 일은 자신의 것이라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 나라에서 잉여 자원은 전쟁을 통해 제국을 세우는 데 쓰이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자를 위한 분배에 쓰인다는 점에서 세속 제국과 하나님 나라의 차이점을 볼 수 있다.
하나님 나라는 사회적 약자가 영원히 패배하는 나라가 아니라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기회를 주고 공정한 분배를 통해 더불어 살아가는 나라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연보의 목적이 공동체의 “균등”에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는 자본이란 “축적”하는 것이 아니라 나누어야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는 개인의 자유보다 공동으로 함께 살아가는 것이 목표이기 때문에 이런 명령에 불만을 가져서는 안 된다.
이스라엘의 실패와 오늘날의 교회
솔로몬 시대의 이스라엘은 가장 많은 자본을 확보한 나라였지만 정작 백성들은 애굽 시절의 노예와 다를 바 없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하나님 나라는 확장을 중요시하지 않고 “방법”에 요점을 둔다는 사실이 주목할 만하다. 하나님 나라가 자본을 이해하는 방식 다섯 가지는
1) 자본은 함께 살아가기 위한 도구, 2) 언제든 자본을 내려 놓을 수 있다는 것, 3) 자본이 우리의 삶의 목적이나 목표가 되어서는 안된다, 4) 성경은 자본 증식을 저수지를 만드는 듯한 방식이어서는 안 된다, 5) 하나님 나라의 경제 제도는 “분배”를 강조한다.
잉여 자원은 많이 벌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웃에 대한 마음으로 내가 만드는 것이다.
노마드 교회 12장 : 하나님을 기억하는 세상
기억하라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 도착한 후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를 세우고 제사장 나라의 역할을 완수하라는 사명을 부여받았다.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를 세우기 위해 이스라엘이 취해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은 무엇이었을까? 성경은 “하나님의 행동”을 기억하라고 거듭해서 명령한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바로와 온 애굽에 행하신 것을 잘 기억하되(신 7 :18)”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신 8:18)”
“너희는 애굽에서 나오는 길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미리암에게 행하신 일을 기억할지니라(신 24:9)"
이스라엘을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왜 이스라엘을 위해 “일”하셨는가?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더라 (출 2:24-25)”
하나님은 당신이 이스라엘을 위해 일하시는 이유가 “언약”을 기억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신다. 출애굽은 하나님 자신이 “약속”한 바를 성실히 이행한 결과다. 하나님 스스로 “약속”하신 바를 이행하는 과정을 통해 진행된다.
내 백성으로 삼고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 벌어진 모든 일이 그분이 일하신 결과다. 하나님의 행동의 최종 목적은 그들을 “백성으로 삼고 그들의 하나님이 되기 위함”이라고 밝힌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바로의 손에서 건져내어 당신의 백성으로 삼기 위해 “행동”하셨다는 것이다.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시는 하나님
하나님이 당신이 하신 일을 “기억”하라고 명령하신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게 하기 위해서다. 다시 말해 하나님 자신이 한 “약속”을 얼마나 신실하게 지키는 분인가를 알게 하기 위해 기억하라는 명령을 내리신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이 하신 일과 그들이 겪은 일을 여러 방법과 절기를 통해 반복적으로 기억해야 했다. 그리고 그것을 자녀들에게 가르쳐야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신 이유는 그들의 조상들에게 한 맹세를 지키기 위해서다. 이제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이 얼마나 “신실한”분인지 알아야만 하는 의무가 부여된다.
기억하는 나라
하나님이 하신 “일”을 기억하는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다시 한번 상기하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신실함을 “기억”하는 나라다. 이스라엘 민족으로 하여금 자신들이 섬길 “왕”을 신뢰할 수 있게 함으로써 “믿음”의 토대를 형성했을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기억”하지 못한다면 “왕”에 대한 신뢰에 문제가 생긱게 된다.
하나님을 신뢰하기보다는 가나안 원주민들이 믿었던 농사의 신에 더 의지했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단순히 하나님을 기억하지 못한 채 잊고 사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신뢰 자체를 잃어버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하나님을 기억한다는 것은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세상의 시스템에 저항한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은 단순히 머리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방식이 아닌 하나님의 방식을 신뢰하고 따르겠다는 적극적인 의지의 표명이자 노력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다.
배신의 나라와 신뢰의 나라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 나라를 세우겠다는 약속을 이행하고 계시는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다. 우리는 신약의 이야기를 읽으며 하나님은 지독할 만큼 자신의 약속에 신실하고 그 약속을 성실하게 지키시는 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예수를 통해 자신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게 된다. 하나님 나라의 중요한 특징은 그 나라가 “하나님의 신실성”에 기초한다는 점이다. 하나님의 신실성이란 하나님 자신이 만든 창조세계의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약속하신 바를 성취하려는 “하나님의 열심”을 말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신실함으로 응답한 예수의 삶을 본받아 교회 역시 신실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교회는 배신당하는 것에 익숙한 청년들에게 “믿어라”, “사랑하라”, “감사하라”, “기도하라”는 식의 요구를 하기보다 교회도 청년들을 위해 “신실하게” 애쓰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노마드 교회 13장 :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드러내는 방법
자신의 약속을 성실히 이행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함”에 보답하기 위해 이스라엘에게 어떠한 “행동”이 요구되는지 살펴보자.
신실하신 하나님께 합당한 신뢰를
성경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위해 일하시는 근거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하신 약속을 지키기 위한 것에 있다고 반복해서 말한다. 성경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하나님의 신실한 행동에 합당한 신뢰를 보이라고 요구한다.
“그런즉 너는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켜 행할지니라(신 7:11)”
신실하신 하나님은 신실한 백성들에게 스스로 하신 약속을 계속 이행하실 것이며, 따라서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걸맞는 신뢰를 보여야 한다. 하나님이 먼저 신실하게 약속을 지키셨으므로 이제는 이스라엘 민족이 새로운 “왕”의 통치를 따르며 그 신뢰에 보답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하는 것으로 증명된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기 위해 행하신 바가 이스라엘에게 “순종”을 요구하는 근거가 된다는 점이다.
거룩과 속됨의 경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어려서부터 보수적인 기독교 집안에서 살아온 나에게 참된 신앙이란 세상의 ‘악’으로부터 구별되는 것을 의미했다. 우리들에게 거룩함이란 세상으로부터의 구별을 의미했고 여기서 “세상”은 “대중문화”로 규정되는 경우가 많았다. 문제는 거룩과 속됨에 대한 교회의 이원론적인 규정이 많은 사람들을 “착한” 청년으로 교화시켰을지 모르지만 역으로 그 “착한” 청년들을 세상과 단절시켰다는 사실이다.
대중문화와 기독교 문화를 구분하는 이분법적이고 편협한 세계관 훈련은 사라져야 하며 기독교 문화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 필요한 때다. 하나님 나라와 세상은 완전히 구분될 수 없고 온 세상이 하나님께 속해있기 때문이다.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
아마도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를 이원론적으로 구분 짓는 해석은 “레위기”의 정결법에서 기인한 것이 아닌가 싶다. “거룩 + 속됨 = 속됨” / 이 정결법에 의하면 이스라엘이 “거룩함”을 지키는 방식은 “접촉”을 금하는 것이며 이것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하나님 나라와 세상의 접촉을 금하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하나님 나라와 세상의 접촉을 금하는 정결법은 세상을 하나님 나라와 이방 나라로 양분해 바라보면서 그런 관점이 옳다고 판단하는 근거로 활용될 수 있다. 그러나 “거룩”한 구별을 통해 이방과 이스라엘을 구분 짓는 것이 하나님이 의도하신 최종 목표는 아니었다. 오히려 거룩한 구별을 통해 이방 나라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표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시는 목적은 제사장 나라오서의 역할을 부여하기 위해서다. 제사장의 역할은 하나님과 죄인을 중보하는 데 있다. 이스라엘은 한 나라로서 그 역할을 부여받았으므로 하나님의 통치를 받지 않는 이방 나라와 하나님을 열결하는 통로가 되어야 한다. 이스라엘이 감당해야 할 거룩한 역할은 폐쇄 및 구분 짓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거룩함을 퍼트리고 확장하는 “선교”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애굽에서 탈출한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저 자신들의 거룩함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벅찼을 것이라고 추측해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이스라엘은 궁극적 목표를 망각하고 종교적 형식을 고집하다가 고립되는 형국을 자초했으며 선민사상에 사로잡혀 폐쇄적이고 위선적인 나라가 되어버리고 말았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세상과 차단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성과 속의 경계에서 거룩을 지키며 적극적으로 살아간다.
<노마드 교회>
강릉 노마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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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마드 교회 7-8장 발제 : 장재혁 목사)
7장 하나님 나라의 회복
하나님의 동역자들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세워지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도하에 이루어진다. 하지만 성경은 “인간”의 역할도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구약성경도 각 권마다 중요한 인물들을 소개하고 있다. 모세오경에서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도구로서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신다(출3:10). 하지만 모세는 자신을 사용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부름에 따른 중압감으로 인해 자신은 적합하지 못하다고 말한다(출3:11). 그는 이 말을 하며 “내가 누구이기에”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이 표현은 하나님의 소명에 대한 거절의 표현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예상 밖의 대답을 하신다.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출3:12) 이것은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일은 모세의 능력과는 무관하다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는 것은 그 사람이 누구인지 여부에 달린 것이 아니라, 누가 함께하는지가 중요하다. 하나님께서는 모세 이후에 여호수아를 사용하신다. 이때에도 여호수아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하나님의 계획에 순응하고 순종하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이 만나 대화를 나누다 보면 “교회”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나온다. 그런데 자신이 다니는 교회의 규모에 따라 말하는 사람의 태도가 다른 것을 느낄 수 있다. 자신이 ‘대형교회’를 다니면 은근히 우쭐하고, ‘개척교회’를 다니면 왠지 주눅 들고 위축 되는 듯하다. 또한 신학교나 교회 안에서도 신분 체계가 존재하는 듯하다. 예를 들면, 목사 자녀, 장로 자녀, 권사 자녀, 집사 자녀, 혼자 믿은 사람 순이다. 이러한 자신의 교회의 규모나 교회 내 부모의 직분은 전부 환경적인 요인일 뿐이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이런 환경적인 요인을 자신의 능력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과연 자신의 나라를 세우는데 이런 환경적인 요인(세속적인 능력)을 사용하실까? 앞에서 살펴본 바에 의하면 신분과 환경이 말해주는 능력은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것과는 무관하다. 하나님은 다윗을 선택하실 때 “외모”를 보지 않으셨다. 성경은 일관되게 하나님이 “외모”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으신다고 말한다. 성경에서 중시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그와 함께하시는가의 여부다. 하나님 나라는 신분과 능력을 초월해 오히려 겸손한 자세로 하나님과 함께하는 자들의 것이다. 하나님은 그런 자들을 귀히 쓰시는 분이다.
나사렛 예수
신약 시대에 접어든 후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당신의 통치 질서를 이 땅에 구현하신다. 그리고 새로운 이스라엘 공동체인 제자들을 선별하셨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그 당시 종교 지도자들과 비교했을 때, 그들의 출신 성분은 부족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예루살렘 종교 지도자들이 아닌 제자들의 마음의 밭에 심겼고 바로 이것이야말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는 출신과 배경을 뛰어넘은 나라다. 오히려 저주의 상징인 십자가를 통해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였고, 가장 천한 동네 출신들이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가져온 참된 일꾼임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의 회복은 큰 교회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하는 교회를 통해 이루어진다.】
8장 가나안에 꽃피는 하나님 나라
하나님 나라의 모델로 제시된 에덴은(창1-2장) 인간에 의해 파괴되었고(창3장), 이후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 “가나안” 땅을 중심으로 하나님 나라를 “회복”하신다.
우리는 애굽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통치 질서가 살아 있는 나라를 세우기 위해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서 비롯된 “민족인”인 이스라엘을 애굽 땅에서 부르신다. 하지만 그들에게서는 하나님 나라의 질서와 통치 체계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뼛속 깊이 애굽의 “종”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바로의 “노예”였던 이스라엘 민족을 건져내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신 뒤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질서 속으로 인도하신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은 뼛속 깊이 사탄의 종노릇하던 우리를 구하여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신 것이다.
애굽의 나라에서 하나님 나라로
하나님과 이스라엘 민족은 출애굽기 19-24장에 걸쳐 시내산 “계약”을 맺게 된다. 이 계약에 보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조건이 있는데, 그것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이다.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 왕의 노예였지만 이제 새로운 왕과 계약을 맺고 새로운 옷을 입었으므로 새로운 “통치” 체계를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함을 의미한다. 이스라엘은 민족은 단순히 영적인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들의 “왕”이 바뀌고 “나라”가 바뀐 것이기 때문에 새로운 통치 체제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구원은 실질적으로 소속된 나라와 통치자가 바뀌는 것을 의미한다.
노예에서 자유인으로
해외여행을 가면 낯선 환경과 문화에 적응하기까지는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하다. 나름대로 준비를 해 가더라도 문제는 “지식”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습관”이다. 몸에 밴 “습관”으로 인해 금방 그 문화에 적응하는 것이 쉽지 않다.
이스라엘 민족 역시 그러했을 것이다. 그들은 약 430년 동안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했고, 어느 날 예상하지 못한 갑작스러운 해방을 맞이했다. 이성적으로는 새로운 나라의 백성이 되었음을 이해하고 새로운 왕을 섬겼을지 모르나 그들에게는 여전히 “애굽”에서의 습관이 뿌리 깊게 남아 있었을 것이다. 때문에 이스라엘은 낯선 환경에 처할 때마다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하소연을 하게 된다.
그런데 그들이 뼛속 깊이 노예가 된 이유는 그들 자신이 “자유”보다 “안정(생존)”을 더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유”와 “인간다움”에 대해 생각해볼 시간과 여유조차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이스라엘의 모습이 오늘날을 살아가는 청년들의 모습과도 오버랩된다. 이 땅의 청년들과 인생이 목적이 “생존” 자체에 달려 있었던 이스라엘 민족은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인생의 목적은 떡이 아니다
하나님은 뼛속까지 노예로 전락한 이스라엘 민족을 “자유인”으로 만들기 위해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잎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알게 하려” 하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인생의 목적과 삶의 방식을 바꿀 것을 요구하셨다. 이는 인간의 삶의 이유가 “떡”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의 삶을, “떡”을 위한 인생에서 “말씀”을 위한 인생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음식”으로 훈련시키셨다. 그 방식은 “먹을 만큼만” 거두기(출16:16), 다름 아닌 “일용할 양식 구하기”였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였다. 떡을 목적으로 살아가던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는 기도를 알려주셨다. 이를 통해,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자”와 “염려하면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마6:31)를 읊어대는 자를 대조하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구해야 할 것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이것이야 말로 제자들의 삶의 궁극적인 목적임을 알려주신 것이다. 당시나 지금이나 “떡”을 포기하기 힘들지만,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의 백성은 떡보다 중요한 것을 발견할 줄 알아야 한다.
【가난에서 탈출하는 방법은 가상화폐나 주식 투기로 대박이 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함으로써 진정한 만족을 얻는 것이다.】
(노마드 교회 9-10장 발제 : 주석환 목사)
9장 피라미드 사회에 역행하는 하나님 나라
피라미드 사회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하면서 목격하고 체험한 사회질서는 철저한 계급과 위계질서로 이루어진 이른바 “피라미드 질서였다. 피라미드의 가장 밑바닥에서 쉼 없이 일하는 자신들과 최상층에서 삶을 즐기는 애굽 귀족들 간에는 견고한 신분의 사다리가 존재했고 이스라엘 민족은 그들과 자신들을 비교하며 신세를 한탄했을 것이다.
어쩌면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해방되었을 때 그들이 세우게 될 나라가 애굽과 비슷할 것이라고 기대했을지 모른다.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민족은 아주 당연하게 초강대국인 “애굽”을 자신들 나라의 모델로 삼았다. 예전과 다른 점 한 가지, 자신들은 최상층이 되고 그 땅의 원주민들이 피라미드 하단부에서 자신들을 위해 일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사회 질서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의 왕이자 신이신 하나님이 계획하신 나라는 피라미드적인 사회 경제 구조와는 한참 거리가 먼 것이었다. 그 나라는 계급 질서를 통해 또 다른 애굽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사회 질서를 백성들에게 제시했다.
① 하나님 나라는 차별없이 “쉼”의 혜택을 부여한다.
② 하나님 나라는 나그네를 노예로 삼는 것이 아니라 대접하는 나라다.
③ 하나님 나라는 노예를 부리는 나라가 아니라 “자유”를 선포하는 나라다.
④ 하나님 나라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않는다.
⑤ 하나님 나라는 타국인을 차별하지 않는다.
⑥ 하나님 나라는 외모와 실력으로 땅을 부여하지 않는다.
⑦ 하나님 나라는 회생의 기회를 부여하는 나라다.
하나님 나라의 사회에 대한 구상과 설계는 애굽의 피라미드식 지배가 아닌 구성원들 상호 간에 아끼고 배려하는 것을 근간으로 한다. 하나님은 “평등”과 “자유”가 살아 있고 서로를 위하는 공동체적 배려가 넘치는 사회를 계획하셨다. 그리고 이러한 “평등”은 하나님의 의도하신 본래의 창조 질서와도 크게 다르지 않다.
[ 이 시대의 피라미드에 역행하는 교회는 주방에서 남녀가 함께 일하는 교회다.]
10장 브레이크 없는 세상과 하나님 나라의 제동장치
멈추지 않는 버스
우리는 브레이크가 고장난 대한민국이란 버스에서 “사고”가 나기만을 무기력하게 기다리고 있는 모양새다. 이 나라에서 버티고 견디면 더 나은 미래가 올 것이라며 희망을 갖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 큰 빚과 빈곤이 기다린다는 가혹한 현실은 우리에게서 꿈을 빼앗고 우리를 무기력하게 만들어버린다.
그런데 하나님이 통치하고자 의도하신 이스라엘은 달랐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나라 역시 사회문제와 빈곤을 완전히 막지는 못했다. 물론 하나님은 여러 가지 제도를 통해 공정한 분배가 이루어지게 의도하셨지만 현실적으로 그런 제도가 인간 사회의 불의한 현상을 완전히 막지는 못했다.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는 개인주의보다는 공동체성을 강조한다. 더불어 사는 삶,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기초다.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에서는 이처럼 개인의 윤리에 기대어 극복할 수 없는 양극화 문제에 대한 해법을 “법”으로 제정해 이스라엘이 애굽화하는 것을 막았다. 그 제도가 바로 “희년”이다. 희년 법은 브레이크가 고장난 버스를 세울 수 있는 “마지막 보루”라고 할 수 있다.
토지는 하나님의 것
성경은 사회 양극화로 인한 불평등과 부의 분배, 지대 추구의 삶에 대해 침묵하는가? 오히려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는 빈곤이 없는 “유토피아”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하나님은 당신이 통치하시는 나라에도 “빈곤”의 문제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성경은 빈곤의 문제가 없는 나라에 대해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하면”이라는 조건을 제시한다.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의 양극화 및 빈곤의 문제는 사람의 순종에 달려 있다. 실제로 성경은 양극화와 빈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개인의 경제 생활을 단속하고 분배와 관련된 사회법을 제정하도록 명령한다.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의 빈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첫 번째로 강조되는 것은 개인의 “나눔”정신이다. 두 번째 해결 방법은 사회법을 통해 강제 분배를 시행하는 것이다.
희년과 하나님 나라
마지막으로 하나님 나라에서 양극화 현상을 막기 위한 가장 급진적 제도는 안식년 중 대안식년 격인 “희년”제도다.
희년은 불평등과 양극화를 막기 위한 마지막 제동장치라고 볼 수 있다. 희년 제도의 핵심 규칙은 빚의 탕감과 노예 해방, 땅의 회복이다.
하나님은 자신이 통치하는 나라에서 정의와 공의가 시행되기를 원하셨다.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는 계급과 신분에 차별이 있는 나라가 아니라 구성원 모두가 평등한 나라이며, 가난하게 태어났고 기회가 박탈되는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균등한 기회가 주어지는 나라다. 또 사회적 약자를 위해 적절한 사회법이 제정되고 지켜지는,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세상이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다.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 나라, 즉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는 “종교”가 아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 운동은 종교 운동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는 주일에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만 부르면 성립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는 사회 ,정치, 경제, 문화를 포함하는 “나라” 그 자체이며 우리 일상 그 자체여야 한다.]
또한 불평등한 세상에 평등을 이루고 전쟁과 탐욕이 가득한 세상에 평화를 만드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진정한 역할이다.
(노마드 교회 11-13장 발제 : 김명석 목사)
노마드 교회 11장 : 하나님 나라와 자본
피할 수 없는 자본주의
현재 우리는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시스템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자본주의 시스템은 경쟁심과 불안이라는 인간의 심리를 이용해 작동한다. 청년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낙오되지 않기 위해서 끝없는 경쟁에 뛰어든다. 급변하는 세상을 쫓기 위해 청년들은 부단히 노력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본이다. 자본을 얼마나 소유하느냐에 따라 사람의 등급을 매기고 그것을 행복의 척도로 삼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면서 자본에서 완전히 독립된 공동체를 만드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하나님 나라의 경제 제도
이스라엘 민족에게 40년 동안 수렵, 채취의 방식으로 이스라엘 민족에게 양식을 공급하셨다. 자신들의 신에게 완전히 기댄 채 양식을 해결해야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농업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인 “물”을 관리하는 독특한 방식을 제안하셨다. “내 규례와 계명을 준행하면 철 따라 비를 주리니....(레 26:3-4)”
하나님은 순종 여부에 따라 계절에 맞추어 비를 주겠다고 약속하셨다. 농업에서 가장 중요한 “비”를 기다리라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막연히” 기다리는 것은 발전을 위해 좋은 방법이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발전하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경쟁하고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에서는 순종을 조건으로 “기다림”이라는 막연한 방법을 요구한다. 하나님 나라의 시스템에서 비를 기다리는 문화는 매우 중요한 가치임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에서 “잉여 자원”은 축적이 아니라 “분배”를 목표로 한다.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의 백성은 자신의 수확물의 십분의 일은 자신의 것이라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 나라에서 잉여 자원은 전쟁을 통해 제국을 세우는 데 쓰이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자를 위한 분배에 쓰인다는 점에서 세속 제국과 하나님 나라의 차이점을 볼 수 있다.
하나님 나라는 사회적 약자가 영원히 패배하는 나라가 아니라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기회를 주고 공정한 분배를 통해 더불어 살아가는 나라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연보의 목적이 공동체의 “균등”에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는 자본이란 “축적”하는 것이 아니라 나누어야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는 개인의 자유보다 공동으로 함께 살아가는 것이 목표이기 때문에 이런 명령에 불만을 가져서는 안 된다.
이스라엘의 실패와 오늘날의 교회
솔로몬 시대의 이스라엘은 가장 많은 자본을 확보한 나라였지만 정작 백성들은 애굽 시절의 노예와 다를 바 없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하나님 나라는 확장을 중요시하지 않고 “방법”에 요점을 둔다는 사실이 주목할 만하다. 하나님 나라가 자본을 이해하는 방식 다섯 가지는
1) 자본은 함께 살아가기 위한 도구, 2) 언제든 자본을 내려 놓을 수 있다는 것, 3) 자본이 우리의 삶의 목적이나 목표가 되어서는 안된다, 4) 성경은 자본 증식을 저수지를 만드는 듯한 방식이어서는 안 된다, 5) 하나님 나라의 경제 제도는 “분배”를 강조한다.
잉여 자원은 많이 벌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웃에 대한 마음으로 내가 만드는 것이다.
노마드 교회 12장 : 하나님을 기억하는 세상
기억하라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 도착한 후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를 세우고 제사장 나라의 역할을 완수하라는 사명을 부여받았다.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를 세우기 위해 이스라엘이 취해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은 무엇이었을까? 성경은 “하나님의 행동”을 기억하라고 거듭해서 명령한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바로와 온 애굽에 행하신 것을 잘 기억하되(신 7 :18)”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신 8:18)”
“너희는 애굽에서 나오는 길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미리암에게 행하신 일을 기억할지니라(신 24:9)"
이스라엘을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왜 이스라엘을 위해 “일”하셨는가?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더라 (출 2:24-25)”
하나님은 당신이 이스라엘을 위해 일하시는 이유가 “언약”을 기억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신다. 출애굽은 하나님 자신이 “약속”한 바를 성실히 이행한 결과다. 하나님 스스로 “약속”하신 바를 이행하는 과정을 통해 진행된다.
내 백성으로 삼고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 벌어진 모든 일이 그분이 일하신 결과다. 하나님의 행동의 최종 목적은 그들을 “백성으로 삼고 그들의 하나님이 되기 위함”이라고 밝힌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바로의 손에서 건져내어 당신의 백성으로 삼기 위해 “행동”하셨다는 것이다.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시는 하나님
하나님이 당신이 하신 일을 “기억”하라고 명령하신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게 하기 위해서다. 다시 말해 하나님 자신이 한 “약속”을 얼마나 신실하게 지키는 분인가를 알게 하기 위해 기억하라는 명령을 내리신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이 하신 일과 그들이 겪은 일을 여러 방법과 절기를 통해 반복적으로 기억해야 했다. 그리고 그것을 자녀들에게 가르쳐야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신 이유는 그들의 조상들에게 한 맹세를 지키기 위해서다. 이제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이 얼마나 “신실한”분인지 알아야만 하는 의무가 부여된다.
기억하는 나라
하나님이 하신 “일”을 기억하는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다시 한번 상기하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신실함을 “기억”하는 나라다. 이스라엘 민족으로 하여금 자신들이 섬길 “왕”을 신뢰할 수 있게 함으로써 “믿음”의 토대를 형성했을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기억”하지 못한다면 “왕”에 대한 신뢰에 문제가 생긱게 된다.
하나님을 신뢰하기보다는 가나안 원주민들이 믿었던 농사의 신에 더 의지했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단순히 하나님을 기억하지 못한 채 잊고 사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신뢰 자체를 잃어버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하나님을 기억한다는 것은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세상의 시스템에 저항한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은 단순히 머리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방식이 아닌 하나님의 방식을 신뢰하고 따르겠다는 적극적인 의지의 표명이자 노력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다.
배신의 나라와 신뢰의 나라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 나라를 세우겠다는 약속을 이행하고 계시는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다. 우리는 신약의 이야기를 읽으며 하나님은 지독할 만큼 자신의 약속에 신실하고 그 약속을 성실하게 지키시는 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예수를 통해 자신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게 된다. 하나님 나라의 중요한 특징은 그 나라가 “하나님의 신실성”에 기초한다는 점이다. 하나님의 신실성이란 하나님 자신이 만든 창조세계의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약속하신 바를 성취하려는 “하나님의 열심”을 말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신실함으로 응답한 예수의 삶을 본받아 교회 역시 신실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교회는 배신당하는 것에 익숙한 청년들에게 “믿어라”, “사랑하라”, “감사하라”, “기도하라”는 식의 요구를 하기보다 교회도 청년들을 위해 “신실하게” 애쓰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노마드 교회 13장 :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드러내는 방법
자신의 약속을 성실히 이행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함”에 보답하기 위해 이스라엘에게 어떠한 “행동”이 요구되는지 살펴보자.
신실하신 하나님께 합당한 신뢰를
성경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위해 일하시는 근거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하신 약속을 지키기 위한 것에 있다고 반복해서 말한다. 성경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하나님의 신실한 행동에 합당한 신뢰를 보이라고 요구한다.
“그런즉 너는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켜 행할지니라(신 7:11)”
신실하신 하나님은 신실한 백성들에게 스스로 하신 약속을 계속 이행하실 것이며, 따라서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걸맞는 신뢰를 보여야 한다. 하나님이 먼저 신실하게 약속을 지키셨으므로 이제는 이스라엘 민족이 새로운 “왕”의 통치를 따르며 그 신뢰에 보답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하는 것으로 증명된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기 위해 행하신 바가 이스라엘에게 “순종”을 요구하는 근거가 된다는 점이다.
거룩과 속됨의 경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어려서부터 보수적인 기독교 집안에서 살아온 나에게 참된 신앙이란 세상의 ‘악’으로부터 구별되는 것을 의미했다. 우리들에게 거룩함이란 세상으로부터의 구별을 의미했고 여기서 “세상”은 “대중문화”로 규정되는 경우가 많았다. 문제는 거룩과 속됨에 대한 교회의 이원론적인 규정이 많은 사람들을 “착한” 청년으로 교화시켰을지 모르지만 역으로 그 “착한” 청년들을 세상과 단절시켰다는 사실이다.
대중문화와 기독교 문화를 구분하는 이분법적이고 편협한 세계관 훈련은 사라져야 하며 기독교 문화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 필요한 때다. 하나님 나라와 세상은 완전히 구분될 수 없고 온 세상이 하나님께 속해있기 때문이다.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
아마도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를 이원론적으로 구분 짓는 해석은 “레위기”의 정결법에서 기인한 것이 아닌가 싶다. “거룩 + 속됨 = 속됨” / 이 정결법에 의하면 이스라엘이 “거룩함”을 지키는 방식은 “접촉”을 금하는 것이며 이것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하나님 나라와 세상의 접촉을 금하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하나님 나라와 세상의 접촉을 금하는 정결법은 세상을 하나님 나라와 이방 나라로 양분해 바라보면서 그런 관점이 옳다고 판단하는 근거로 활용될 수 있다. 그러나 “거룩”한 구별을 통해 이방과 이스라엘을 구분 짓는 것이 하나님이 의도하신 최종 목표는 아니었다. 오히려 거룩한 구별을 통해 이방 나라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표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시는 목적은 제사장 나라오서의 역할을 부여하기 위해서다. 제사장의 역할은 하나님과 죄인을 중보하는 데 있다. 이스라엘은 한 나라로서 그 역할을 부여받았으므로 하나님의 통치를 받지 않는 이방 나라와 하나님을 열결하는 통로가 되어야 한다. 이스라엘이 감당해야 할 거룩한 역할은 폐쇄 및 구분 짓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거룩함을 퍼트리고 확장하는 “선교”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애굽에서 탈출한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저 자신들의 거룩함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벅찼을 것이라고 추측해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이스라엘은 궁극적 목표를 망각하고 종교적 형식을 고집하다가 고립되는 형국을 자초했으며 선민사상에 사로잡혀 폐쇄적이고 위선적인 나라가 되어버리고 말았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세상과 차단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성과 속의 경계에서 거룩을 지키며 적극적으로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