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달한권_아카데미] - 『C.G융과기독교』_세번째 모임_튜터백우인

백우인
2019-07-06
조회수 1944

「C.G융과 기독교」세번째 책모임을 마치고


페르소나와 그림자의 개념을 주로 얘기했던 세 번째 시간을 돌아 본다. 모임을  끝마칠 무렵  뭔가 우리 안에 불안함을 조성했던 페르소나에 대해 시원하게 풀린 느낌이었다는 피드백이 있었다. 페르소나는  가면이기 때문에 나쁜 것이고 벗어 버려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다고 한다. 


어제의 독서 모임 시간을 품고 있자니 재미난 실험 하나가 떠올라  그 실험과 함께 페르소나의 개념을 풀어 보려고 한다.  또  어느 페친이 찍은 사진을 그림자 개념과 함께 짧게 소개해 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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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ㅡ그림자가 있는 혼합물적인 존재


 크로마토그래피는  싸인펜 속에 들어 있는 혼합물들을 하나씩 하나씩 펼쳐지게 하는 실험 방법이다. 분필에 검은 색으로 보이는 한 점을 찍어 분필 끝부분을 물에 담그면 노랑 주황 파랑 등 다양한 색깔이 분필에 펼쳐져 드러난다. 그 모습을 보고 검은색 싸인펜은 여러가지 색깔이 합해진 혼합물 이었음을 알게 된다. 


사회가 원하는 우리의 자아 또한 혼합물이다.

한 가지로만 이루어진 순물질로서의 인격은 사회 부적응이고 자아 형성의 결핍, 혹은 자폐아라는 병리적 인간으로 라벨을 달게 된다.  자기self 안에 있던 자아ego가 자기 밖으로 떨어져 나오는 과정은 성장과 성숙의 과정이며 이 과정의 성패는 얼마나 다양하고 적절한 페르소나를 잘 썼는지에 달려 있다. TOP, 말하자면 시간과 상황과 장소라는 공간에  얼마나 적합하게 페르소나를 썼는지에 달려있다.   


페르소나란 배우가 어떤 특별한 역을 하기위해 쓴 가면을 의미하는데 융은 어떤 개인이 살고 있는 사회에 보여지는 자신의 외면적 역할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했다.  그렇기 때문에 페르소나는  진정한 내가 아니고 남들이 생각하는 나,  즉 집단 정신에 동화되어 있는 자신이다. 


사회화 과정에서의 성장과 성숙이란  페르소나의 적절성을 잘 드러내는 것이며 페르소나의 적절성에 기댄 것만이 의미가 있다.  사회는 정오표를 메뉴얼 처럼 만들어 놓고   제대로 잘 하고 있는지 어떤지에 대해 OX표시를 한다.  사회는 연극 배역을 맡겨 주고 얼마나 그 배역에 적합하게 잘 했는지를  의심의 눈초리와 비판의 자를 들고 관람하는 평가자들이다.


사람들은 다양하게 배정된 역할에 심취하다 보면 박수갈채도 받지만 또 너무 심취한 나머지 TOP를 분간하지 못하고 동일시에 빠지고 만다. 즉 존재론적인 동일시에 빠져서   자신이 쓰고 있는 페르소나에 환멸을 느끼며 벗어던지려고 한다.


페르소나에 대한 오해는 바로 이지점, 자아와의 동일시하는 지점에서 시작 되며 크로마토그래피가 필요한 시점이다.  페르소나는 존재론적 동일시의 구조가 아니다. 다만 관계적 구조일 뿐이다. 나와 세상 사이에서의  관계를 말해 주며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를 말해줄 뿐이다. 


그런데 마치 수많은 페르소나가  자아와 동일한 것처럼 여기면서 분열된 모습에 괴로워 한다. 가식적이라고 혐오하며 불온하고 은밀한 비밀의 냄새를 숨기고있는 것 처럼 여긴다.


다양한   페르소나는 내가 아니라 타자인 사회가 원하는 메뉴얼이고 나는 그것에 따라 맡은 역할을 잘 해내야 한다. 그런데 그것이 나쁜가? 거짓인가? 위선인가? 라고 물을 수 있고 그렇다라고 말할 수 있는가?


페르소나 자체에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평가를 내릴 수 없고 오히려 사회가 요구하는 페르소나를 제대로 쓰지 않을 때 도덕적 윤리적 책임과 추궁을 당한다.  그런 의미에서  페르소나는 규범이고 하나의  법조항이 되며 준수해야 할 내용으로 전환된다.


페르소나는 나를 둘러싼 환경과 관계되는 인격이며 반드시 필요한 가면이다.  가면을 벗어 버렸다고 치자. 사람 다움, 목사 다움, 교육자 다움, 제자 다움 등과 같은 '~다움'은 사라지고 호모 사피엔스는  퇴락과 퇴행의 길로 빠질 것이다.


 페르소나는 벗어버려야 할 가면이 아니라  사회라고 하는 그물과도 같은 관계망  안에 들어갈 때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사회적 역할을 잘 해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페르소나에 대해 우리는 다만 나의 본질과  다르다는 구별을 할 수 있으면 된다. 

페르소나는 내 본질이 아니라 나와 외부 세계가 관계맺을 때 필요한 구조일 뿐이다. 


그림자에 대하여

  

개인 그림자는 그 사람의 일반적인 의식에서 억압된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다. 프로이트는 이 억압들로부터  무의식이 형성 된다고 보는 반면,  융은 무의식은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고 여기서 의식이 분화되어 나온다고 말한다. 


융이 말하는  그림자는 주체와 같은 성, 즉 동성으로 나타난다. 내 생각에 그림자는 도화지  한 쪽 면에  물감을 묻힌 후 대칭이 되도록 도화지를 접으면 접은 선을 기준으로 반대쪽에  똑같이 나타나는 그림인 데칼코마니다.  그림자는 어떤 사람의 열등한 인격 혹은 좋지 않은 부분적 성격이다.  그런데 이것은  의식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속성이기 때문에 억압되어 형성된 또 하나의 '어두운 나' 이다.  


사물은 하나의 상만 드러내고 있어서 드러낸 그 모습이 전부인 줄 알지만, 거울이나 잔잔한 수면을 만나면  거울과 맞닿은 면이나 수면과 맞닿은 면을 중심축으로 정확하게  또 하나의 상이 그림자로 투사(반사) 된다.  


마찬가지로 융이 말하는 우리 의식의 억압된 형태인 그림자는  게으르거나 교만하거나 사치하는 등 여러 이유로  타인을 비난하는 그 지점이 마치 거울과 잔잔한 수면처럼, 정확하게  우리의 억압된 의식이 밖으로 투사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 사람의 그림자에 대해 이해한다는 것은 결국 자기 이해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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