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 2018년 10월 4일(목)
5부는 예수와 여자들 챕터의 후반부를 읽었습니다. 이번에는 17장만 공유합니다.
17장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7:53-8:11)
이전 장면에서 예수는 자신이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에게 약속하신 생수라고 주장하였기에 바리새인들의 분노를 불러 일으켰고, 바리새인들은 이에 함정을 준비하였습니다.
간음 하다 붙잡은 여자를 데려와 모세율법을 따를지 않을지를 따져 묻습니다.
베일리는 예수가 흙에 쓴 들은 “죽음”, “여자를 죽여라”나 “여자를 돌로 쳐라”같은 말을 썼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철저히 모세 율법을 지키는 쪽을 택하셨다는 것입니다.
또한 판결 집행 방법도 정하시는데 죄가 없는 자가 먼저 치라고 하십니다.
군중 속에 숨어 있는 개인을 표면으로 등장시키며 행위에 가담한 책임을 인정하라고 요구합니다.
상황이 역전되어 예수가 아닌 바리새인들이 망신을 당하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는 바리새인과의 논쟁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죽어도 누구도 책임지지 않았을 잔인한 폭력의 사슬에 붙잡힌 여자의 생명에 관심이 있습니다. 예수는 그들이 함정으로 파놓은 율법과 로마의 법을 모두 역으로 이용하여 생명을 살립니다.
- 나눔 중 더 생각해 볼 이야기들
① 이 나눔은 한임숙 권사님과 김성규 성도님의 고민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단순히 교리적으로 학습된 내용 이 아니고, 간음한 여인이 예수의 값진 사랑으로 자기 목숨을 구한 사례처럼 실제적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내 죄 사이의 연관성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서요”
“그리스도가 우리 죄 때문에 죽으셨다”(고전15:3)는 대속의 그림은 여자와 예수의 관계에서 충분히 공감됩니다. 그러나 대속의 교리를 우리의 실존에서 고백하기는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이것을 단순히 교리적으로 믿고 가라고 하는 현재의 교회의 모습이 젊은 세대를 이탈시키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봅니다. 나와 예수의 십자가의 핵심 의미를 연결시키는 작업을 교리적 언어를 벗어나서 설명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② 읽을 때 궁금했던 여자의 간음행위와 관련한 질문과 더불어 최명숙 교수님의 “간음죄로 고발당한 여인변론”을 읽고 참고하여 교훈까지 써봤습니다.
여자는 과연 간음 하였을까? 상대는 어디 갔을까? 단순히 돌려보낸 것일까?
유대사회에서 여자들은 자유를 가진 한 인격체가 아니라 남자의 소유물로 존재할 뿐이고, 간음금지 조항 또한 남성 소유권 보장의 측면에서 제정된 것이기에 철저히 남성 중심 사회 속에서 생각해야 한다. 그렇다면 여성의 주도로 간음이 가능할까? 간음을 주도하는 것도 결국 남성이지 않았을까? 아니 어쩌면 그냥 성폭행라고 말하는 게 당시 사회적으로 더 어울리는 것 아닌가? 결국에는 부당함의 결정체가 바로 여자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의 판결은 오늘날에도 비슷한 프레임을 씌우려고 하는 구조적 불의함을 마주하게 한다.

일시 : 2018년 10월 4일(목)
5부는 예수와 여자들 챕터의 후반부를 읽었습니다. 이번에는 17장만 공유합니다.
17장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7:53-8:11)
이전 장면에서 예수는 자신이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에게 약속하신 생수라고 주장하였기에 바리새인들의 분노를 불러 일으켰고, 바리새인들은 이에 함정을 준비하였습니다.
간음 하다 붙잡은 여자를 데려와 모세율법을 따를지 않을지를 따져 묻습니다.
베일리는 예수가 흙에 쓴 들은 “죽음”, “여자를 죽여라”나 “여자를 돌로 쳐라”같은 말을 썼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철저히 모세 율법을 지키는 쪽을 택하셨다는 것입니다.
또한 판결 집행 방법도 정하시는데 죄가 없는 자가 먼저 치라고 하십니다.
군중 속에 숨어 있는 개인을 표면으로 등장시키며 행위에 가담한 책임을 인정하라고 요구합니다.
상황이 역전되어 예수가 아닌 바리새인들이 망신을 당하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는 바리새인과의 논쟁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죽어도 누구도 책임지지 않았을 잔인한 폭력의 사슬에 붙잡힌 여자의 생명에 관심이 있습니다. 예수는 그들이 함정으로 파놓은 율법과 로마의 법을 모두 역으로 이용하여 생명을 살립니다.
- 나눔 중 더 생각해 볼 이야기들
① 이 나눔은 한임숙 권사님과 김성규 성도님의 고민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단순히 교리적으로 학습된 내용 이 아니고, 간음한 여인이 예수의 값진 사랑으로 자기 목숨을 구한 사례처럼 실제적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내 죄 사이의 연관성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서요”
“그리스도가 우리 죄 때문에 죽으셨다”(고전15:3)는 대속의 그림은 여자와 예수의 관계에서 충분히 공감됩니다. 그러나 대속의 교리를 우리의 실존에서 고백하기는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이것을 단순히 교리적으로 믿고 가라고 하는 현재의 교회의 모습이 젊은 세대를 이탈시키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봅니다. 나와 예수의 십자가의 핵심 의미를 연결시키는 작업을 교리적 언어를 벗어나서 설명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② 읽을 때 궁금했던 여자의 간음행위와 관련한 질문과 더불어 최명숙 교수님의 “간음죄로 고발당한 여인변론”을 읽고 참고하여 교훈까지 써봤습니다.
여자는 과연 간음 하였을까? 상대는 어디 갔을까? 단순히 돌려보낸 것일까?
유대사회에서 여자들은 자유를 가진 한 인격체가 아니라 남자의 소유물로 존재할 뿐이고, 간음금지 조항 또한 남성 소유권 보장의 측면에서 제정된 것이기에 철저히 남성 중심 사회 속에서 생각해야 한다. 그렇다면 여성의 주도로 간음이 가능할까? 간음을 주도하는 것도 결국 남성이지 않았을까? 아니 어쩌면 그냥 성폭행라고 말하는 게 당시 사회적으로 더 어울리는 것 아닌가? 결국에는 부당함의 결정체가 바로 여자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의 판결은 오늘날에도 비슷한 프레임을 씌우려고 하는 구조적 불의함을 마주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