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무트 틸리케(Helmut Thielicke, 1908-1986)는 남자와 여자의 성은 서로를 구성하는 양극성에 있으며, 나중에 결합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서 유래한다고 말한다. 그는 성의 문제를 단순히 도덕적 문제로 접근하지 않으며, 심리학의 기술적인 문제로 보지도 않는다. 그는 성의 문제를 인간 존재론의 문제로 인식하였다. 그래서 성 윤리학의 1장의 첫 파트를 ‘인간론 위기’라는 제목으로 시작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론적 문제를 의식하고, 어떤 특별한 종류의 성찰이나 자기 자신을 반성하도록 도전을 주는 친절한 목회 상담만이 리비도를 공격할 수 있다. 그 특별한 성찰의 목적은 욕구하는 몸이 한 인간 존재에 속해 있는 동시에 다른 인간 존재에도 속해 있다는 확신에 도달하는 데 있다. 그 인간 존재는 값을 주고 산 존재이며, 일시적 운명과 또 영원한 운명을 가진 존재이다. 그는 이 운명에서 다른 사람이 책임 있게 그의 전임성에 참여할 것을 주장한다.”
틸리케는 인간의 성의 실존에서 에로스와 아가페를 말한다. 플라톤은 비이성적인 에로스와 이성에 의해 통제되는 에로스를 말한다. 욕망하는 에로스는 아름다운 육체를 갈망하고, 이성에 통제되는 에로스는 상승하는 성향을 가지며 마지막 단계에 이르러서는 의식적 아름다움으로 사람을 이끈다. 그래서 외적 형태들로부터 독립하여 아름다움의 이데아에 참여하여 아름다워진다. 플라톤의 에로스 이해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도출할 수 있다. 첫째, 에로스는 다른 사람의 가치와 관련이 있다. 둘째, 에로스는 이 가치라는 수단에 의해 그 자신을 완전하게 하고자 노력한다. 소크라테스는 디오타마에게 에로스에 관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에로스가 무엇인가를 욕구한다면, 그것은 그에게 무엇인가가 결여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갖고 있지 않은 것과 우리가 결여하고 있는 것만 사랑한다. 세상사람 중에 누가 자신이 이미 갖고 있는 것을 욕구하겠는가?”
에로스는 언제나 “자기-사랑”이다. 이것은 항상 자기 안에 자신을 독점하고, 충족시키고, 소유하는 원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에로스가 정화의 단계를 거칠 때, 그것은 매우 숭고한 형태의 모습으로 발견된다. 곧 더 훌륭한 자아에 대한 열망, 이것과 관련하여 이데아를 관망하고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자아의 사랑과 다르지 않다.
아가페는 인간의 본래성을 목적으로 한다. 안더스 니그렌은 그의 저서 에로스와 아가페에서 에로스는 아름다움이나 이데아를 향해 위로 나아가는 영혼의 갈망으로, 아가페를 자기를 내어주는 희생하는 사랑으로 아래를 향해 나아가는 사랑이라고 해설한다. 아가페는 에로스와 대조되는 개념으로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요 3:16)과 관련하여 사용된다. 하나님의 사랑은 에로스의 의미에서 더 이상 가치가 없는 인간에게 집중한다. 불완전한 인간 실존 속에 있는 자신의 형상을 사랑하신다. 또 아가페가 본래성을 목적으로 한다고 할 때, 이 본래성은 이성처럼 존재론적 속성으로 제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본래성은 본래적 속성들의 종합이 아니라, 오히려 관계(Relation)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즉 인간은 자신 안에서 어떤 완전한 것을 발견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으로 창조되었다. 인간은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아가페를 발견할 수 있다.
아가페의 발견은 인간을 다른 방향으로 이끈다. 한 인간의 존재를 전적으로 다른 차원으로 이해되기 시작한다. 어떤 인간의 이용 가치가 에로스적인 의미(나 자신을 완성하는 것에 있어서 그의 중요성)로 완전히 상실되었다 해도, 그와 공동체로 존재하는 것을 멈출 수 없다. 틸리케는 오직 이런 토대 위에서만 우리가 어떻게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가페에서 나는 다시는 다른 사람을 나의 대적자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뿐만 아니라 나는 그 사람이 내게 대해 가진 기능과 그를 동일시하지도 않는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그가 가진 인간의 본래성을 이루는 교제)로서 그를 보고, 그리고 그가 가진 기능을 초월한 영역에 있는 자로서 그를 본다.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잘 가르치신 것처럼, 내가 내 믿음을 원수에게 보여주고 그로 인해 고통을 당할 때, 죄 많은 자녀로 인한 하나님의 슬픔이 내 슬픔이 된다. 그리고 이것이 자신의 원수와 아가페를 연결한다. 탕자의 비유에서 집에 머물러 있던 큰아들의 죄는 그가 자신의 아버지와 함께 기뻐하지 않고 함께 슬퍼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간단히 말해서 그는 아가페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플라톤의 에로스를 세 단계를 가진다고 말합니다. 마지막 단계인 아름다움의 이데아로 나가고자 하는 상승의 동력은 결핍이라고 생각됩니다. 결국 결핍이 강할수록 에로스는 상승하는 것이죠. 기독교 신앙 안에서 결핍은 오히려 하나님의 발견할 수 있는 중요한 요건이 아닌가 싶습니다.

헬무트 틸리케(Helmut Thielicke, 1908-1986)는 남자와 여자의 성은 서로를 구성하는 양극성에 있으며, 나중에 결합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서 유래한다고 말한다. 그는 성의 문제를 단순히 도덕적 문제로 접근하지 않으며, 심리학의 기술적인 문제로 보지도 않는다. 그는 성의 문제를 인간 존재론의 문제로 인식하였다. 그래서 성 윤리학의 1장의 첫 파트를 ‘인간론 위기’라는 제목으로 시작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론적 문제를 의식하고, 어떤 특별한 종류의 성찰이나 자기 자신을 반성하도록 도전을 주는 친절한 목회 상담만이 리비도를 공격할 수 있다. 그 특별한 성찰의 목적은 욕구하는 몸이 한 인간 존재에 속해 있는 동시에 다른 인간 존재에도 속해 있다는 확신에 도달하는 데 있다. 그 인간 존재는 값을 주고 산 존재이며, 일시적 운명과 또 영원한 운명을 가진 존재이다. 그는 이 운명에서 다른 사람이 책임 있게 그의 전임성에 참여할 것을 주장한다.”
틸리케는 인간의 성의 실존에서 에로스와 아가페를 말한다. 플라톤은 비이성적인 에로스와 이성에 의해 통제되는 에로스를 말한다. 욕망하는 에로스는 아름다운 육체를 갈망하고, 이성에 통제되는 에로스는 상승하는 성향을 가지며 마지막 단계에 이르러서는 의식적 아름다움으로 사람을 이끈다. 그래서 외적 형태들로부터 독립하여 아름다움의 이데아에 참여하여 아름다워진다. 플라톤의 에로스 이해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도출할 수 있다. 첫째, 에로스는 다른 사람의 가치와 관련이 있다. 둘째, 에로스는 이 가치라는 수단에 의해 그 자신을 완전하게 하고자 노력한다. 소크라테스는 디오타마에게 에로스에 관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에로스가 무엇인가를 욕구한다면, 그것은 그에게 무엇인가가 결여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갖고 있지 않은 것과 우리가 결여하고 있는 것만 사랑한다. 세상사람 중에 누가 자신이 이미 갖고 있는 것을 욕구하겠는가?”
에로스는 언제나 “자기-사랑”이다. 이것은 항상 자기 안에 자신을 독점하고, 충족시키고, 소유하는 원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에로스가 정화의 단계를 거칠 때, 그것은 매우 숭고한 형태의 모습으로 발견된다. 곧 더 훌륭한 자아에 대한 열망, 이것과 관련하여 이데아를 관망하고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자아의 사랑과 다르지 않다.
아가페는 인간의 본래성을 목적으로 한다. 안더스 니그렌은 그의 저서 에로스와 아가페에서 에로스는 아름다움이나 이데아를 향해 위로 나아가는 영혼의 갈망으로, 아가페를 자기를 내어주는 희생하는 사랑으로 아래를 향해 나아가는 사랑이라고 해설한다. 아가페는 에로스와 대조되는 개념으로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요 3:16)과 관련하여 사용된다. 하나님의 사랑은 에로스의 의미에서 더 이상 가치가 없는 인간에게 집중한다. 불완전한 인간 실존 속에 있는 자신의 형상을 사랑하신다. 또 아가페가 본래성을 목적으로 한다고 할 때, 이 본래성은 이성처럼 존재론적 속성으로 제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본래성은 본래적 속성들의 종합이 아니라, 오히려 관계(Relation)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즉 인간은 자신 안에서 어떤 완전한 것을 발견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으로 창조되었다. 인간은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아가페를 발견할 수 있다.
아가페의 발견은 인간을 다른 방향으로 이끈다. 한 인간의 존재를 전적으로 다른 차원으로 이해되기 시작한다. 어떤 인간의 이용 가치가 에로스적인 의미(나 자신을 완성하는 것에 있어서 그의 중요성)로 완전히 상실되었다 해도, 그와 공동체로 존재하는 것을 멈출 수 없다. 틸리케는 오직 이런 토대 위에서만 우리가 어떻게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가페에서 나는 다시는 다른 사람을 나의 대적자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뿐만 아니라 나는 그 사람이 내게 대해 가진 기능과 그를 동일시하지도 않는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그가 가진 인간의 본래성을 이루는 교제)로서 그를 보고, 그리고 그가 가진 기능을 초월한 영역에 있는 자로서 그를 본다.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잘 가르치신 것처럼, 내가 내 믿음을 원수에게 보여주고 그로 인해 고통을 당할 때, 죄 많은 자녀로 인한 하나님의 슬픔이 내 슬픔이 된다. 그리고 이것이 자신의 원수와 아가페를 연결한다. 탕자의 비유에서 집에 머물러 있던 큰아들의 죄는 그가 자신의 아버지와 함께 기뻐하지 않고 함께 슬퍼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간단히 말해서 그는 아가페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플라톤의 에로스를 세 단계를 가진다고 말합니다. 마지막 단계인 아름다움의 이데아로 나가고자 하는 상승의 동력은 결핍이라고 생각됩니다. 결국 결핍이 강할수록 에로스는 상승하는 것이죠. 기독교 신앙 안에서 결핍은 오히려 하나님의 발견할 수 있는 중요한 요건이 아닌가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