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무트 틸리케는 ‘리비도’에 대한 다채로운 이해를 시도한다. 그는 우선 리비도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리비도는 쾌락을 동반하고 쾌락을 완전한 충족을 위해 황홀경으로 돌진하려는 갈망이다. 그것은 다른 인간 존재와 함께 영혼과 육체 안에서 하나가 되기를 갈망한다.” 이 리비도는 인격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는다. 첫째, 리비도는 순간적인 “결합”을 목표로 한다(반면 인격적 관계는 “유대관계를” 추구한다). 둘째, 리비도는 타인을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것이긴 하지만 동시에 자기실현을 추구한다. 이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먼저 부정적인 의미로, 이것은 쾌락(오르가즘)을 충족시킴으로 쾌락의 고통을 없애고자 한다. 긍정적인 의미에서는 황홀감에 도달해 자신을 초월하고자 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삶에서 마주하는 창조적 경험, 생산 능력, 다른 사람을 즐겁게 해줌으로써 그들이 또한 나 자신을 욕망하는 실존의 즐거움, 그리고 내 젊음과 “무한한 잠재력”을 확인하게끔 해주는 것 등과 연결된다. 마지막으로 리비도는 리비도의 만족은 인간이 단지 뇌의 기계적 명령에 반응 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나타낸다. 이것은 인간이 “자아를 이해할 수 있는” 영혼을 가진다는 것을 입증하는 정신적·육체적 고양과 연결된다.
위의 내용과 관련하여 리비도와 관련하여 성은 (에로스의 관점에서도) 기능적인 특징을 넘어서 인격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틸리케는 이런 점에 있어서 리비도를 좀 더 정밀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성충동은 단지 인격적인 구성 요소들(정신, 양심 등)과 반대되는 것으로 이해되면 안 된다. 기독교는 육체와 정신을 극단적으로 구분하는 헬레니즘 철학을 거부하고, 인간을 통합적으로 이해한다. 이렇게 인간을 하나님 앞에서 통합적인 존재로 바라볼 때 우리는 리비도가 실제로 다른 사람과 의사소통을 원하고 다른 사람을 섬기려고 노력하는지에 대해 질문해야 하며, 단순히 자기만족이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을 원하는지 질문해야만 한다.
틸리케는 리비도가 인간 존재 안으로 통합된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것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이 “인간적”인 것은 이성과 양심의 가르침에 이끌리는 삶을 살기 때문만이 아니라, 자신 안에 이미 “자신을 –타자에게로- 지향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리비도가 욕망할 때, 그것은 그 자신만을 욕망할 수 없다. 그것은 다른 사람도 고려해야 한다. 그리고 그 사람을 욕망하는데 그칠 수도 없고, 그를 반드시 긍정해야 한다. 리비도는 자신 안에 섬김의 원리, 곧 섬기는 사랑의 원리를 가져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자신의 목표로 인해 자기를 포기하게 되고 또 기만당한다. 남녀 간 성 구조의 불일치는 존재론적·자연적 의미에서 어떤 결점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바로 그 결점이 엄밀하게 인간에게-또한 육체적 영역에서도-인간이 될 기회를 준다. 육체적인 영역에서, 인간은 동물적 본능이 자동으로 움직이는 자동행동을 초월한다.”
이것은 실제 성관계에서 어떻게 나타날까? 결혼 안에서 배우자와의 성관계는 자기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를 섬기겠다고 욕망할 때 나타난다. 한 배우자가 먼저 자신의 배우자가 원하는 최상의 것을 위해 노력할 때, 그도 상대 배우자로부터 최상의 것을 받게 될 것이다. 성관계에서의 만족은 스스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 헌신할 때 가질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어떻게 아가페가 성관계를 매개로 등장하는지 볼 수 있다. 아가페의 특징은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지 않으면서도”, 바로 “그렇게 하여” 모든 것을 얻는 특징이 있다.
에로스와 아가페의 밀접한 연관성을 신학적 인간론으로 접근할 때, 우리는 두 가지를 볼 수 있다. 하나는 성생활이 육체적인 측면에 내맡겨지지 않는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가페를 고상한 차원의 것으로 보지 않다는 것이다. 이렇게 고상함과 열등함으로 구분하는 태도는 윤리적으로 무관심해지던지 아니면 성적인 영역을 마귀화 한다. 기독교 역사에서 이런 두 가지가 자주 등장하였다. 그러나 리비도의 영역은 인간존재 안에 포함되어 있는 것임을 인정해야한다. 그리고 그것은 아가페와도 밀접한 연관성을 가진다. 반대로 아가페도 리비도의 영역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며, 그것을 해방시킨다.
헬무트 틸리케의 신학적 인간론을 바탕으로 한 성의 접근은 “이것을 해라.”, “이것을 하지 마라.”를 넘어섭니다. 리비도는 인간의 존재 안에 포함되어 있는 한 부분이며(부정해야 할 것이 아니다), 인간의 성은 자기실현임(에로스)과 동시에 파트너에 대한 섬김(아가페)입니다. 이것은 분리될 수 없으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런 관점은 불필요한 도덕주의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킵니다. 그렇다고 이로 인해 방종으로 나아가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자기실현과 파트너에 대한 섬김으로 이어집니다. 우리가 여성과 남성으로 창조된 것은 축복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서로로 말미암아 존재하는 우리. 어떤 보물이 우리 관계 안에 숨겨져 있을까요?
드디어 이번 여름 방학 때 진행했던 한달한권 영남신학대학교 그냥과 보통 모임 마지막 후기를 씁니다. 마지막 모임이 8월 마지막 주에 가졌었는데, 개강하고 밀려든 많은 일들 때문에 이제야 쓰게 되네요. 여름 방학 동안 하나님의 인간성, 예수의 인문학, 위대한 열정, 불온한 독서, 성 윤리학을 읽었는데요. 맴버들과 이야기를 할 때면 책 내용에 대한 서로의 관점이 풍성함을 가져다 준 것도 있었지만, 세대 간의 이해(구성원 네 명은 20대, 한 분은 40대)가 이루어진 점이 특히 고무적이었습니다. 이제 새물결플러스에서 하는 한달한권은 끝나지만 책모임은 계속될 예정입니다. 한달한권을 참여할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다른 모든 지역에서 모임을 진행하는 모임들마다 늘 풍성함이 있기를 기원하겠습니다.

헬무트 틸리케는 ‘리비도’에 대한 다채로운 이해를 시도한다. 그는 우선 리비도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리비도는 쾌락을 동반하고 쾌락을 완전한 충족을 위해 황홀경으로 돌진하려는 갈망이다. 그것은 다른 인간 존재와 함께 영혼과 육체 안에서 하나가 되기를 갈망한다.” 이 리비도는 인격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는다. 첫째, 리비도는 순간적인 “결합”을 목표로 한다(반면 인격적 관계는 “유대관계를” 추구한다). 둘째, 리비도는 타인을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것이긴 하지만 동시에 자기실현을 추구한다. 이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먼저 부정적인 의미로, 이것은 쾌락(오르가즘)을 충족시킴으로 쾌락의 고통을 없애고자 한다. 긍정적인 의미에서는 황홀감에 도달해 자신을 초월하고자 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삶에서 마주하는 창조적 경험, 생산 능력, 다른 사람을 즐겁게 해줌으로써 그들이 또한 나 자신을 욕망하는 실존의 즐거움, 그리고 내 젊음과 “무한한 잠재력”을 확인하게끔 해주는 것 등과 연결된다. 마지막으로 리비도는 리비도의 만족은 인간이 단지 뇌의 기계적 명령에 반응 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나타낸다. 이것은 인간이 “자아를 이해할 수 있는” 영혼을 가진다는 것을 입증하는 정신적·육체적 고양과 연결된다.
위의 내용과 관련하여 리비도와 관련하여 성은 (에로스의 관점에서도) 기능적인 특징을 넘어서 인격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틸리케는 이런 점에 있어서 리비도를 좀 더 정밀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성충동은 단지 인격적인 구성 요소들(정신, 양심 등)과 반대되는 것으로 이해되면 안 된다. 기독교는 육체와 정신을 극단적으로 구분하는 헬레니즘 철학을 거부하고, 인간을 통합적으로 이해한다. 이렇게 인간을 하나님 앞에서 통합적인 존재로 바라볼 때 우리는 리비도가 실제로 다른 사람과 의사소통을 원하고 다른 사람을 섬기려고 노력하는지에 대해 질문해야 하며, 단순히 자기만족이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을 원하는지 질문해야만 한다.
틸리케는 리비도가 인간 존재 안으로 통합된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것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이 “인간적”인 것은 이성과 양심의 가르침에 이끌리는 삶을 살기 때문만이 아니라, 자신 안에 이미 “자신을 –타자에게로- 지향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리비도가 욕망할 때, 그것은 그 자신만을 욕망할 수 없다. 그것은 다른 사람도 고려해야 한다. 그리고 그 사람을 욕망하는데 그칠 수도 없고, 그를 반드시 긍정해야 한다. 리비도는 자신 안에 섬김의 원리, 곧 섬기는 사랑의 원리를 가져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자신의 목표로 인해 자기를 포기하게 되고 또 기만당한다. 남녀 간 성 구조의 불일치는 존재론적·자연적 의미에서 어떤 결점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바로 그 결점이 엄밀하게 인간에게-또한 육체적 영역에서도-인간이 될 기회를 준다. 육체적인 영역에서, 인간은 동물적 본능이 자동으로 움직이는 자동행동을 초월한다.”
이것은 실제 성관계에서 어떻게 나타날까? 결혼 안에서 배우자와의 성관계는 자기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를 섬기겠다고 욕망할 때 나타난다. 한 배우자가 먼저 자신의 배우자가 원하는 최상의 것을 위해 노력할 때, 그도 상대 배우자로부터 최상의 것을 받게 될 것이다. 성관계에서의 만족은 스스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 헌신할 때 가질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어떻게 아가페가 성관계를 매개로 등장하는지 볼 수 있다. 아가페의 특징은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지 않으면서도”, 바로 “그렇게 하여” 모든 것을 얻는 특징이 있다.
에로스와 아가페의 밀접한 연관성을 신학적 인간론으로 접근할 때, 우리는 두 가지를 볼 수 있다. 하나는 성생활이 육체적인 측면에 내맡겨지지 않는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가페를 고상한 차원의 것으로 보지 않다는 것이다. 이렇게 고상함과 열등함으로 구분하는 태도는 윤리적으로 무관심해지던지 아니면 성적인 영역을 마귀화 한다. 기독교 역사에서 이런 두 가지가 자주 등장하였다. 그러나 리비도의 영역은 인간존재 안에 포함되어 있는 것임을 인정해야한다. 그리고 그것은 아가페와도 밀접한 연관성을 가진다. 반대로 아가페도 리비도의 영역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며, 그것을 해방시킨다.
헬무트 틸리케의 신학적 인간론을 바탕으로 한 성의 접근은 “이것을 해라.”, “이것을 하지 마라.”를 넘어섭니다. 리비도는 인간의 존재 안에 포함되어 있는 한 부분이며(부정해야 할 것이 아니다), 인간의 성은 자기실현임(에로스)과 동시에 파트너에 대한 섬김(아가페)입니다. 이것은 분리될 수 없으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런 관점은 불필요한 도덕주의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킵니다. 그렇다고 이로 인해 방종으로 나아가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자기실현과 파트너에 대한 섬김으로 이어집니다. 우리가 여성과 남성으로 창조된 것은 축복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서로로 말미암아 존재하는 우리. 어떤 보물이 우리 관계 안에 숨겨져 있을까요?
드디어 이번 여름 방학 때 진행했던 한달한권 영남신학대학교 그냥과 보통 모임 마지막 후기를 씁니다. 마지막 모임이 8월 마지막 주에 가졌었는데, 개강하고 밀려든 많은 일들 때문에 이제야 쓰게 되네요. 여름 방학 동안 하나님의 인간성, 예수의 인문학, 위대한 열정, 불온한 독서, 성 윤리학을 읽었는데요. 맴버들과 이야기를 할 때면 책 내용에 대한 서로의 관점이 풍성함을 가져다 준 것도 있었지만, 세대 간의 이해(구성원 네 명은 20대, 한 분은 40대)가 이루어진 점이 특히 고무적이었습니다. 이제 새물결플러스에서 하는 한달한권은 끝나지만 책모임은 계속될 예정입니다. 한달한권을 참여할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다른 모든 지역에서 모임을 진행하는 모임들마다 늘 풍성함이 있기를 기원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