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중 마지막 모임으로 새 책으로 시작했습니다. 판넨베르크 조직신학 2권입니다.
제가 책을 정하고 보니 어떻게 진행할지 혼란스러웠습니다. 우선 판넨베르크 자체를 잘 모르고 조직신학이란 신학의 분과도 너무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선 판넨베르크에 대해서 할 수 있는 한 자료를 수집했습니다. 그리고 판넨베르크의 ‘조직신학 1’과 헤르만 바빙크의 ‘개혁교의학 1권’, 리처드 멀러 교수의 ‘신학서론’, 티슬턴의 ‘기독교 교리와 해석학’, 한병수의 ‘신학의 통일성’, 마이클 호튼의 ‘개혁주의 조직신학’, 고든 루이스& 브루스 데머리스트의 ‘통합신학 1,2,3’을 살펴보았습니다. 논문도 한10여 편 다운받아 읽기 시작했습니다.
한 사람의 살아온 여정을 짧게나마 둘러보았습니다. 판넨베르크의 집이 폭격 당했다는 부분에서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날로 환원하면 집이 경매가 실행되는 상황, 어린 시절 부모의 죽음 등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그 무렵 소위 ‘빛의 경험’이 그를 진리 한 가운데로 걸어가게 하는 원동력은 틀림없지만, 바로 걸어가지는 않게 보였습니다. 신학이 뿌리내린 채 철학을 섭렵한 것이 아닌, 신학에 철학이 상당히 영향을 주었다고 보였습니다.
바빙크가 말하듯, (조금 수정해서) 누구나 시대의 아들이요, 나그네의 신학을 합니다. 그는 바빙크의 이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신학의 유의미성을 확신했다고 보입니다. 왜냐하면 아우구스티누스의 진리 그 그 자체로의 인도와 진리가 ‘참’으로 인도하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역사신학과 조직신학, 성경 신학을 하나의 신학으로 승화시켰다는 평가를 받는 그는 ‘신학자’임에 틀림없어 보입니다. 그의 삶에 대해 알아볼 자료들이 없어 아쉬웠습니다.
우선 조직신학 1권의 ‘서론’에 대해 잠시 나눴습니다. 말복인 어제, 교회에서 대접해 주신 ‘삼계탕’이 계획에 없이 저희들이 대접받았기 때문에 ‘잠시’가 되었습니다.
교의학의 내용은 성경과 교회의 신앙고백, 그리스도인의 의식(意識)입니다. 바빙크는 이를 명시하고 있으며, 판넨베르크는 이 세 가지를 분명히 하나하나씩 다루며 교의학이 자신의 목적인 진리를 찾아가는 방법에 대해 다룹니다.
바빙크는 이 셋 중 어느 하나도 소홀히 여기지 않고, 그 나름의 의미대로 가져야 교의학의 올바른 내용이 된다고 보았으며, 판넨베르크는 성경 무오성의 도전과 현대의 엄청난 비판을 짧게 요약하고, 이 비판을 인식하고 ‘계시의 증인’등을 들어 회귀한 칼 바르트를 비판합니다. 교회의 합의가 계시와 같은 권한을 줄 수 있겠는가에 대한 의문과 그리스도인의 의식에 대한 슐라이어마허의 비판을 함께하며, 자신의 ‘역사로서의 계시’가 계시임을 논증해 갑니다.
2014년 판넨베르크의 사후, 그의 제자의 제자이며, 조직신학 1,2권의 공역자인 안희철 박사는 이런 말을 합니다.
‘그는 너무나 다양하며 섞이지 않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대한 해명이 필요할 것 같다.’
방중 모임은 이것으로 마칩니다. 이제 마지막 학기에 판넨베르크를 더 깊이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의 창조보다 기독론을 깊이 보고 싶습니다. ^^
방중 마지막 모임으로 새 책으로 시작했습니다. 판넨베르크 조직신학 2권입니다.
제가 책을 정하고 보니 어떻게 진행할지 혼란스러웠습니다. 우선 판넨베르크 자체를 잘 모르고 조직신학이란 신학의 분과도 너무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선 판넨베르크에 대해서 할 수 있는 한 자료를 수집했습니다. 그리고 판넨베르크의 ‘조직신학 1’과 헤르만 바빙크의 ‘개혁교의학 1권’, 리처드 멀러 교수의 ‘신학서론’, 티슬턴의 ‘기독교 교리와 해석학’, 한병수의 ‘신학의 통일성’, 마이클 호튼의 ‘개혁주의 조직신학’, 고든 루이스& 브루스 데머리스트의 ‘통합신학 1,2,3’을 살펴보았습니다. 논문도 한10여 편 다운받아 읽기 시작했습니다.
한 사람의 살아온 여정을 짧게나마 둘러보았습니다. 판넨베르크의 집이 폭격 당했다는 부분에서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날로 환원하면 집이 경매가 실행되는 상황, 어린 시절 부모의 죽음 등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그 무렵 소위 ‘빛의 경험’이 그를 진리 한 가운데로 걸어가게 하는 원동력은 틀림없지만, 바로 걸어가지는 않게 보였습니다. 신학이 뿌리내린 채 철학을 섭렵한 것이 아닌, 신학에 철학이 상당히 영향을 주었다고 보였습니다.
바빙크가 말하듯, (조금 수정해서) 누구나 시대의 아들이요, 나그네의 신학을 합니다. 그는 바빙크의 이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신학의 유의미성을 확신했다고 보입니다. 왜냐하면 아우구스티누스의 진리 그 그 자체로의 인도와 진리가 ‘참’으로 인도하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역사신학과 조직신학, 성경 신학을 하나의 신학으로 승화시켰다는 평가를 받는 그는 ‘신학자’임에 틀림없어 보입니다. 그의 삶에 대해 알아볼 자료들이 없어 아쉬웠습니다.
우선 조직신학 1권의 ‘서론’에 대해 잠시 나눴습니다. 말복인 어제, 교회에서 대접해 주신 ‘삼계탕’이 계획에 없이 저희들이 대접받았기 때문에 ‘잠시’가 되었습니다.
교의학의 내용은 성경과 교회의 신앙고백, 그리스도인의 의식(意識)입니다. 바빙크는 이를 명시하고 있으며, 판넨베르크는 이 세 가지를 분명히 하나하나씩 다루며 교의학이 자신의 목적인 진리를 찾아가는 방법에 대해 다룹니다.
바빙크는 이 셋 중 어느 하나도 소홀히 여기지 않고, 그 나름의 의미대로 가져야 교의학의 올바른 내용이 된다고 보았으며, 판넨베르크는 성경 무오성의 도전과 현대의 엄청난 비판을 짧게 요약하고, 이 비판을 인식하고 ‘계시의 증인’등을 들어 회귀한 칼 바르트를 비판합니다. 교회의 합의가 계시와 같은 권한을 줄 수 있겠는가에 대한 의문과 그리스도인의 의식에 대한 슐라이어마허의 비판을 함께하며, 자신의 ‘역사로서의 계시’가 계시임을 논증해 갑니다.
2014년 판넨베르크의 사후, 그의 제자의 제자이며, 조직신학 1,2권의 공역자인 안희철 박사는 이런 말을 합니다.
‘그는 너무나 다양하며 섞이지 않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대한 해명이 필요할 것 같다.’
방중 모임은 이것으로 마칩니다. 이제 마지막 학기에 판넨베르크를 더 깊이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의 창조보다 기독론을 깊이 보고 싶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