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달한권_총신_연희교회] - 『현대신약성서연구』_3번째 모임_김정규

김정규
2018-07-25
조회수 1219

 세 번째 방중 모임을 가졌습니다. 원하지 않는 삶이 원하게 되는 것은 진정 새로움입니다.

요 21: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번 주는 연희교회의 ‘도서관’에서 진행하였는데, 많은 책들에 둘려있는 기분 좋음이 있었습니다.

이번 주는 스티브 월턴의 ‘사도행전’과 대럴 L. 복의 ‘누가’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이 둘의 공통된 주제는 ‘누가의 신학과 역사성’입니다. 대럴 복은 BCENT의 누가복음, 누가신학, 복음서를 통해본 예수 등으로 우리에게 익숙합니다. 스티브 월턴은 성경이해시리즈 ‘복음서와 사도행전’의 저자입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그 분량만으로 신약성서 중 가장 많습니다. 누가복음은 복음서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사도행전은 누가가 기록했지만, 역사서의 성격도 가지고 있는 신약의 유일한 역사서입니다. 또한 역사서로 보기에 바울의 행적과 일치하지 않은 부분으로 인해 그 역사성에 대해 의심을 받기도 합니다.

누가-행전이란 주제로 거의 전 텍스트(?)를 읽으며 설명한 박이삭 전도사님께 수고했다고 전해주고 싶습니다.

스티브 월턴은 사도행전의 역사성에 대해 의문을 품은 새로운 접근법에 대해 개관합니다. 이 개관법의 전제는 사도행전의 역사성에 대해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 문제됩니다. 우선, 역사성을 배제해서는 안 되겠지만, 만일 사도행전이 누가의 신학만을 반영한다고 보면 독자가 얻을 수 있는 유익은 무엇일까요? 오히려 하워드 마샬과 같이 역사성을 인정해야만 사도행전이 읽히지 않을까요? 이는 믿음을 너무 강조한 것일까요?

아우구스티누스의 연구자로서 프랑스 아카데미의 종신회원인 에티엔느 질송은 이런 말을 합니다. ‘믿음은 아주 정상적 사유의 한 단계로서 그것은 가정과 가정으로 구성된 사회의 필연적인 조건이다’

즉, 가정을 지탱하는 것은 이성이전의 믿음인데, 이 믿음은 부모가 아이의 진정한 부모인지 이성적 증명을 요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역사성을 의심하여 행해진 연구가 문제가 아니라 배제한 것이 큰 문제입니다. 그러나 정확하게 집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의심은 결국 배제로 나아간다는 것이며, 이성은 이것을 제어할 힘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새로운 접근법도 시도한 자들의 참신한 믿음일 뿐입니다. 역사성의 믿음은 우리의 이성이 자신의 한계를 스스로 인지하는 동시에 넘어서게 해 줄 것입니다.

누군가에겐 합리적 믿음이 이성의 도움으로 이성을 통하여, 이성으로 완성됩니다. 오히려 이성을 통한 믿음을 배제하는 것은 이성의 본연의 기능을 가로막는 것입니다.

대럴 복은 누가복음이 진정 말하고자 하는 것을 주목합니다. 누가의 신학적이고 목회적 목적에 그 쟁점을 맞춥니다. 구약의 예언과 그 성취, 예수의 구원사역과 그가 누구인지에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누가는 사도행전을 염두에 두고 누가복음을 썼을까요? 그렇다면 그 정도는 사도행전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요? 그리고 이것을 성령님은 어떻게 역사하셔서 기록하셨을까요?

저자는 누가-행전을 통해 새로운 공동체로 사는 삶에 대해 그 복과 어려움을 말합니다.

이제 현대신약성서연구는 한주가 남았습니다. 이제 살펴볼 주제는 크게 바울이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40도의 무더위에도 열심히 참석해준 전도사님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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