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달한권_새물결플러스] - 『인간』_백우인

백우인
2018-07-16
조회수 1304

2018.6.18 새물결플러스 한달한권 모임 "인간"
 일곱번째 시간: 타인과 함께 존재하고, 관계를 맺으며,  
 세상을 가꾸어가고 함께 살아가는 Imago Dei, Imago Christi

 이번 시간에는 3부 마지막을 다루고 마지막 4부로 넘어가는 시간이었는데 좀 다들 바쁘고 늦고 좀 정신 없었던 하루였습니다 ???????????? 그래서 원래 예정으로는 기독교와 불교의 대화를 백목사님이 발제해 오시고, 박목사님이 페리코레시스적 관계성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의 5번을 맡아주시고, 제가 15장 하기로 했는데 백목사님 발제만 하고, 제 발제하고 마쳤습니다 ㅎ... 아쉬운 마음에 이번 후기에는 빠진 부분을 첨가하여 업로드 하는 점을 기억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ㅎ...

 [제 13장 불교의 인간론: 남방 상좌부 불교를 중심으로
 - 타자와 세계와 미래를 향한 개방성, 너 없이는 나도 없다]
 : 되게 어려운 내용이 많았습니다. 두카로서의 인간 실존, 두카의 발생, 두카의 중단, 팔정도와 정견, 무아로서의 인간... 그리고 기독교와 불교의 대화로 마무리되는 글이었는데 이번 후기에서는 우리가 배우고 주목할 만한 문장들만 올려봅니다.
 "어제와 내일의 나와 오늘의 나는 오늘의 나와 타자와 등거리에 있다. 이와 같은 자아와 타자의 동등성의 관계가 자비의 실천 근거다." -> 자신의 개인적 과거의 계기들과 현재 다른 곳에 있는 계기들이 지금의 "나"와 같은 거리에 있다는 석가의 가르침은 기독교적 인간론에 유의미한 도전이 된다. / "우리의 자아는 타자의 관계성 속에서 완성된다. 자아는 타자와의 사랑의 관계성 안에서 자기 초월을 실현함으로써 단지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완성해 간다."/ "기독교의 모든 문제들은 결국 참된 자기부정의 영성이 상실되고 이기적인 자아만 준동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를 때, 우리는 그와 더불어 부활의 생명력이 넘치는 하나님의 영원한 삶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제 14장 페리코레시스적 관계성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 호모 엠파티쿠스로서의 평화의 사도]
 : 이번 파트는 4부 처음 파트로써 지금까지 배웠던 논의들(성서의 인간, 교회 전통에서의 하나님의 형상 이해를 거쳐, 인간 안의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과 타자와의 관계성, 운명으로서의 하나님의 형상과 역사로서의 인간, 관계론적 삼위일체론과 페리코레시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공감적 사랑, 대상관계 이론에서의 관계적 인간: 공감적 이해)을 종합하면서 인간성을 잃어가는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다룹니다. 여기에서도 정리하는 파트이다 보니 주목할만한 문장만 올려봅니다.
 "기독교 인간학은 인간의 존귀함이 그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사실에 있다고 본다. 오늘날 인간은 이 하나님의 형상을 다시 회복하고 완성해가야 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의 얼굴이 하나님을 향하고 우리의 행동이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 이루어질 때에만 우리는 온전한 인간이 될 수 있다. - 교부들의 인간 이해"
 "하나님의 형상은 '닳아서 거의 다 없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거기에 남아 있다.' - 어거스틴"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가 가장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임을 본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라 그와 같이 되면 우리의 참된 경건과 의와 순수함과 지성이 회복되어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게 된다. - 칼빈"
 "나의 존재의 근저에서 그리고 시초부터 나는 당신의 존재(Thou)와 대면한다. - 칼 바르트"
 "하나님의 형상은 처음부터 완전히 실현된 것이 아니라 실현 과정 가운데 있다. 하나님의 형상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완전하게 실현되었다. / 인간은 열려진 미래로서의 자신의 운명의 성취를 향한 과정 속에 있는 역사적 존재다. / 인간의 본성은 인간 운명의 실현의 역사 자체다. - 판넨베르크"
 "인간의 관계성, 즉 인간이 하나님과 다른 피조물과 인격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인간은 관계성 안의 존재로서 인간의 인격은 관계성 안에서 형성된다."
 "기독교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나타난 하나님과 함께 고통당하는 공감적 사랑(compassionate empathic love)이 인간을 구원하고 인간 안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킨다는 것이다. 성령에 의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인간은 또한 성령에 의해 하나님의 페리코레시스적인 삶에 참여 한다."
 "우리는 세상에서 이웃과의 인격적 관계 속에서 공감적 사랑을 실천하도록 부름 받는다. 다시 말하면, 우리 그리스도인은 탈자아적 개방성 안에서 이기적 자아의 벽을 허물고 타자를 향해 나아가며 타자와 함께 고통당하는 공감적 사랑 안에서 자기를 내어주는 희생적인 섬김의 삶으로 부름 받는다."
 "인간은 공감적 사랑의 능력이 성장하는 만큼 성숙하고 온전한 인간이 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신학적 함의를 갖는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공감적 사랑이 인간을 죄로부터 구원하고, 모든 상처를 치유하며, 인간 안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완성한다고 선언하기 때문이다."

 [제15장 생태학적 기독교 인간론에 대한 조직신학적 고찰
 : 세계를 경작하고 잘 지켜가야 할 인간의 사명]
 - 이번 글은 제가 발제했습니다. 저자인 윤교수님은 지구온난화와 같은 환경 문제에 대해 기독교 인간론이 생태학적으로 재구성되어야 함을 밝히며, 이원론적 세계관을 지적하고, 하나님 형상에 대한 올바른 이해, 인간 인격과 생명에 대한 이해, 소외된 인간 실존으로서의 전통적 이원론적 세계관의 극복으로 나타나는 관계의 회복과 화해 개념, 체현 인간론, 그리고 결론적으로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에 대한 만유재신론적 비전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 이 글의 의도입니다. 여기에서도 우리가 주목할만한 주장에 대해서 나누고자 합니다.
 "인간만이 아니라 미시적 차원을 포함하는 모든 차원의 현실적 존재가 경험의 주체다. ... 모든 현실적 존재는 타자와의 관계 성 안에서 주체적 경험 (인식)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형성한다. 현실적 존재는 선험적으로 존재하고 지속되는 실체적 실재가 아니라 관계성 안에서 형성되는 관계적 존재다. 그리고 온전한 주체성은 경험의 시초가 아니라 경험의 끝에 완성되며, 완성됨과 동시에 소멸한다. - 화이트헤드"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다른 피조물을 대표하며 또한 다른 모든 피조물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을 대신한다. 따라서 하나님과 인간의 계약은 전체 피조세계와 생태계의 복지와 온전성을 위한 것이다. 인간은 피조세계와 생태계의 복지와 온전성을 위한 하나님과의 계약의 상대방으로서 부름을 받는다."
 "인간 안의 하나님 형상은 단지 영혼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육체적 실존을 포함한 전인격에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전인격으로서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기 때문이다."
 "타자는 주체(나)에 의해 정복되고 소유되어야 하는 대상으로서 나의 필요와 목적을 위한 도구적 가치의 관점에서 평가된다... 즉, 여기서 왜곡된 관계성과 소외된 인간 실존은 더욱 극단화된 집단적.계층적 대립의 양태로 나타난다... 인간 공동체의 사회적 정의와 자연 세계의 생태학적 정의는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샐리 멕페이그 - 죄란 인간이 자신이 다른 모든 존재들과의 상호연관적이고 상호 의존적인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고 그 관계를 이원론적인 지배와 종속의 관계로 왜곡시키는 것이다."
 "몰트만에 따르면, 자연신학은 하나님 나라의 유비인 자연 안에서 들리는 하나님의 언어를 '주목'하고 자연의 언어를 '배우며' 그 목소리를 '경청함으로써' 자연과 지혜롭게 교제하며 사는 길을 열어준다. 인간이 자연과의 관계에서 소외와 착취의 관계를 변혁시켜 조화와 공생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은 악을 정복하고 하나님의 의를 실현함으로써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구현하는, 하나님의 구원과 화해의 역사를 위한 본질적 요소다. 따라서 특별히 오늘날 생태학적 위기의 상황에서 그리스도인은 사회 정의와 아울러 생태 정의의 실현을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는다. 즉 우리는 자연과 함께 인간을 '창조하시고' 자연을 통해 '말씀하시며' 새 창조의 세계를 열어주시는 '창조자 하나님을 믿는 신앙 안에서' 인간과 자연 세계의 모든 다른 존재를 동료 피조물로 이해하는 창조 공동체를 형성하는 삶을 실천해야 한다."
 "우주는 변화하고 진화하며 미래 개방적이다. 하나님의 창조는 계속되며, 인간은 계속되는 창조의 동역자로 부름을 받는다. 창조 이야기는 상호연관적이고 상호 의존적이다.그것은 하나의 공동의 이야기다. 모든 존재들은 근본적으로 상호연관적이고 상호 의존적이다. - 샐리 맥페이그의 체현 인간론"
 『세계는 하나님의 현존에 의해 침투되고 하나님의 한없는 삶의 충만함에 참여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귐 속에 거하는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원형(Urbild)을 따라 무아적인 사랑 가운데 서로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며, 하나님의 페리코레시스라는 공간에 함께 거하는 운명 공동체로서 살아간다.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 우주적 페리코레시스가 실현되는 이 같은 종말론적 만유재신론의 (초월성과 내재성의 조화) 비전 안에서, 인간과 세계가 영원한 하나님의 존재에 온전히 참여하는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가 최종적으로 완성된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창 2:15)" 세 가지 논의를 정리하며 떠오르는 생각은 자연 이해와 인간 이해에 대한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불교의 인간론에서는 나라는 존재는 타자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 페리코레시스적 인간론에서는 인간은 타자와의 관계성 안에 살아간다는 것, 생태학적 인간론에서는 군림과 정복이 아닌 공생과 보존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 그동안 인간 이해의 이원론적인 부분이 인간과 자연 모두에게 해악이 되었고, 이에 따라 관계론적-존재론적 인간론으로의 패러다임이 요구된다는 것이 왜 그런지 알게 되었습니다. 성경에서는 인간에게 다스리고 정복하라고 하면서 동시에 경작하며 지킬 것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이것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이원론적 세계관으로 인간을 갈라놓은 부분에 대해 기독교도 반성하고 제고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하며, 함께 해결해가야 할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이로 인해 기독교는 세 가지 글이 공통적으로 주는 두 가지 도전에 응답해야 함을 느낍니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형상으로써 이루어가는 삶과 또 페리코레시스적 관계성 가운데 요구되는 타자를 끌어안는 삶을 어떻게 실현해가야할지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복 주시며 이르시되 내 백성 애굽이여, 내 손으로 지은 앗수르여, 나의 기업 이스라엘이여, 복이 있을지어다 하실 것임이라 (사 19:25)" 이 본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괴롭혔던 국가들 또한 축복하시는 장면이고, 그 날에 이루어질 일임을 이사야가 예언하고 있습니다. 결국 그들 또한 하나님이 지으신 존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배척하고 구별짓기보다 이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또 어떻게 함께 살아가야 할지를 고민하고 대화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회는 이제 더 이상 모이기만 하는 성전 공동체가 아니라 세상 가운데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실현해야 할 성막 공동체이고,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부르는 성도가 하나의 교회입니다. 다른 개인을 이해하고 인정하며,
 화해와 환대가 이루어지며, 세상의 모든 악한 질서를 극복하는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를 우리가 이루어가야 함을 도전합니다.

 또 다른 하나는 구별과 거룩에 관한 문제를 어떻게 현대적으로 해석하고 접근해야 할지입니다. 죄를 소외된 인간 실존으로 해석하고 현상적인 부분보다 자기중심적으로 죄를 접근하는 경우가 많은 현실입니다. 기독교는 이것에 대해 죄로 인해 고통받는 이들을 예수님의 공감적 사랑을 실현함으로 구원하는 것과 인간을 한정짓고 분열을 일으키게 하는 죄의 실존에 대해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어떻게 구별과 거룩을 새롭게 해석하고 이어갈 수 있을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구약에서도 희년 공동체 가운데서는 이방인의 구분이 사라졌고, 신약에서도 예수님의 식탁 가운데서는 유대인을 넘어 이방인으로 구원 받는 자의 경계가 확장되었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며 죄로 인해 고통받는 이들을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구원하며, 죄를 만드는 모든 악한 세력들 (이른바, 칼 바르트가 제시한 무(無)라는 개념으로서의 파괴를 지향하는 엔트로피)을 정확히 직시하고 이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라 배척하며 이 땅의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야 합니다. 이에 대해 고민하고 생각하며 기독교에서 먼저 교회에서부터 인간을 어떤 존재로 이해하고 가르쳐야 하는지 주목하고, 듣고, 배우고, 이야기할 수 있는 공동체가 되어 세상을 구원하는 그리스도의 공동체로써의 명맥을 이어갈 수 있기를 소망하며 윤교수님이 14장에 제안하신 마지막 글로 후기를 마칩니다.

 『호모 엠파티쿠스(Homo Empathicus)로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탈자아적 개방성 안에서 공감적 사랑을 실천하는 그리스도인만이 인류와 세계의 희망이다. 우리에게는 공감의 기도, 공감의 영성, 공감적 사랑의 실천이 필요하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그리스도인들은 공감적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이 땅에 평화를 심는 평화의 사도들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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