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서평]영혼, 한없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던 그 개념은 과연 실재하는가

새물결플러스
2018-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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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가 된 셜록 홈즈

리브 김 | 256쪽 | 14,000원

글 _ 추헌호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녔던 나에게 신앙은 삶의 근간이었다. 신앙에 대한 다양한 고민과 공부는 청소년기부터 시작되었다. 대학생이 되어서는 보편 인간을 사랑하지 못하는 내 모습을 보면서 내가 정말 거듭난 신자인가 묻는 것이 가장 고통스럽고도 중요한 문제였다. 1년을 한편으로는 기도하고 한편으로는 공부하면서 이 문제에 매달렸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결국 얻게 된 것은 내가 신자인가 아닌가에 대한 답이 아니라 과거에 겪었던 소위 은혜의 경험들이 어린 시절부터 교육받아 내 안에 자리잡은 기독교 가치관이 만들어낸 환영이 아니었을까 하는 회의였다. 내가 믿어왔던 것들이 전부 가짜일 수 있다는 공포 속에서 오랜 시간 신에게 부르짖었지만 어떤 형태로의 응답도 없었고, 결국 나는 정 반대의 시도를 해 보기로 결심했다. 신이━기독교의 전통적인 신관에 부합하는 신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었다━없다는 사실을 증명해내면, 또는 절대적으로 선하고 전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증명해내면 내가 기대한 방식은 아니더라도 어쨌든 나를 혼란스럽게 하는 문제는 해결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가능한 일인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으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신이 없거나 있다고 해도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을까? 여러 가지 공략 루트 중 하나가 바로 영혼의 존재였다. 사실은 영혼이 없다면? 영혼이라는 것은 뇌라는 전기화학 회로의 작용을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낸 허상은 아닐까? 만약 뇌의 전기 신호를 완벽하게 분석한 후, 인위적인 전기 자극을 통해 그것을 다른 사람의 뇌에서 완벽하게 재현할 수 있다면, 영혼의 작용이라고 일컬어지는 인간의 모든 심리 작용은 인간의 기술로 통제가 가능해질까? 전통적인 기독교 교리에서 말하는 회심, 거듭남이라는 현상도 인간의 힘으로 일어나게 할 수 있는 것 아닐까? 모든 도덕적 행동을 향한 동기도 인위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을까? 그렇다면 신이 설 자리가 어디에 있겠으며, 은혜라고 부를 만한 것이 뭐가 있겠는가? 사실 이런 논의를 할 필요도 없이, 영혼이 없다면 무엇보다 사후 세계도 없는 것이고, 그렇다면 굳이 절대적인 가치를 좇을 필요가 어디에 있겠는가? 어차피 죽으면 끝나는데!


짧게 요약했지만 이것이 내가 아직도, 그리고 아마도 앞으로도 오랜 시간 계속 붙잡고 있을 문제 중 하나일 것이다. 문제에 접근하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신경과학(neuroscience)과 인지과학(cognitive science)의 연구를 통해 뇌의 전기 신호를 분석해서 인간이라는 존재를 어디까지 파헤쳐볼 수 있는지를 공부하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형이상학적인 논리 전개를 통해 영혼의 존재가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는 결론을 끌어내보는 것이었다. 아는 게 없으니 책을 읽어야 했다. 첫 번째 방법에 관해서는 <Consciousness and the Brain>과 같은 책을 읽기 시작했다. 두 번째에 대해서는 <의지의 자유>, <죽음에 이르는 병> 같은 책을 읽다가, 바로 이 글의 주인공인 <철학자가 된 셜록 홈즈>까지 읽게 되었다.


이미 쓴 바와 같이 나에게 영혼의 존재 여부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이다. 비단 나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도 영혼에 대한 질문은 여러 심리철학의 논의들로 들어가기 위한 입구가 되어준다고 생각한다. 일단 영혼의 존재 여부를 고민하기 시작하면 굉장히 다양한 방향으로 생각의 줄기들이 자라난다. 그런데 이 책에서 다루는 내용들은 영혼의 존재 여부를 묻는 지점으로부터 파생된 내가 했던 많은 생각들과 거의 일치한다! 고민의 여러 단편에 대해서는 부분적으로 답을 얻고자 노력하고 있었지만, 한 권의 책에서 내가 영혼에 대해 고민했던 거의 모든 문제를 개략적으로나마 다루고 있다는 사실이, 그래서 앞으로 어떤 식으로 공부해 봐야 할 지 알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 눈물 날 정도로 반가웠다. 질문 형식으로 책의 내용을 요약해보면 이 다섯 가지로 추릴 수 있을 것 같다.


1. 인간의 마음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행동주의에 대한 논의)

2. 뇌와 정신(또는 마음)의 관계는 무엇인가? (동일론, 기능주의, 속성 이원론, 이중측면 이론에 대한 논의)

3. 영혼이 있다면 어떻게 물질계에 영향을 미치며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짝지음 문제, 인과의 문제에 대한 논의)

4. 한 사람의 인격이 지속적이라고 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5. 자유 의지는 무엇을 의미하며 과연 실재하는가?


1번 문제는 사실 그렇게 어려운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이 책에서 유일하게 완벽하게 반박 당하는 입장이 바로 행동주의다. 2, 3, 4, 5번 문제는 다 내가 고민했던 문제들인데, 가볍게 어떤 생각들을 했는지 그리고 그 생각들이 책과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이제부터 써보겠다. 모든 질문과 내가 해왔던 생각의 전부를 다 적으면 글이 지나치게 길어질 것 같아서 2번과 5번 문제에 대해 개략적으로만 적어보려고 한다. 하지만 그 정도로도 이 책의 의미가 크다는 점, 그리고 많은 것을 얻어갈 수 있다는 점은 잘 전달될 것이라고 믿는다.


2번 문제에 대해서는 글의 도입부에서 이미 다뤘다. 내가 했던 몇 가지의 사고 실험의 결론 중 하나가 뇌의 전기화학 회로 상태를 그대로 다른 뇌에서 재현할 수 있다면━딱히 기술적으로 불가능할 이유를 찾아내지 못했다━회심이나 도덕적 동기도 얼마든지 인간에 의해 만들어질 수 있지 않겠냐는 점이었다. 이 책에서는 크게 네 가지의 입장을 다룬다. 영혼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심리 상태는 뇌의 상태와 동치라는 입장(동일론), 마음의 상태는 하나의 기능으로 봐야 하며 이는 서로 다른 신경적 토대 위에서 실현될 수 있다는 입장(기능주의), 전통적인 기독교가 지지할 법한 마음과 신경 상태는 서로 구분된 존재라는 입장(속성 이원론), 마음의 상태는 분명 주관적 특징을 가지지만 여전히 하나의 물질인 실체의 두 측면 중 하나로 설명 가능하다는 입장(이중측면 이론).


동일론은 실제 철학계에서 이미 몰락했다는 것 같지만, 나는 여전히 동일론에 대한 반박이 부실하다는 느낌을 떨쳐버리지 못하겠다. 이 책에서 나오는 반론은 크게 두 가지, 즉 동일성에 대한 논의와 돌고래 비유로 설명되는 의식에 대한 논의다. 동일성 논의에서는 마음에 담겨 있는 여러 의미가 신경 상태에는 없다는 반박이 전개되는데, 애초에 ‘의미’ 자체가 추상적인 단어다. 비유로 나온 시집 이야기에 대해 논하자면, 신경 정보를 시집 대신 전시했을 때 관람하는 사람이 감동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신경 상태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갓 태어난 아이가 시를 읽고 감동을 느끼지 못하는 것과 다를 게 없다. 신경 상태를 완벽하게 분석해서 신경 상태를 봤을 때 그것이 어떤 예술 세계를 창조하고 있는가를 인지할 만큼 인간의 지능과 기술력이 아직 뛰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돌고래 비유에 대해서도, 신경계에 대한 정보만으로 해당 개체 스스로의 의식을 그대로 느낄 수 없다는 말은 너무 성급하다. 돌고래의 뉴런 하나 하나가 어떤 작용을 하며 그것이 정확히 세포 하나 하나에서 어떤 변화를 일으키는지 완벽하게 분석한 신경과학자가 있는가? 나는 전문가는 아니지만 자연대 대학생으로서 그런 혁신적인 연구 결과가 있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신경과학은 제대로 시작된 지 채 100년도 지나지 않았다. 의미 있는 연구 결과들이 쏟아지고는 있지만 아직 뇌의 작용을 완벽하게 분석할 수준은 아니다. 정말로 개별 뉴런의 작용과 그에 따른 모든 세포의 변화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다면, 비유에 나오는 돌고래가 무슨 느낌인지 공감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인간이 그 모든 정보를 알아내고 또 성공적으로 활용할 만큼 똑똑한 존재인가는 별개의 문제다. 또 다른 비유인 방에서 나온 사람이 빨간색을 인식할 수 있을까에 대한 논의도 같은 방식을 적용해서 설명할 수 있다. 즉 의식에 대한 논의는 환원주의를 논파하기에는 아직은 다소 약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홈즈의 이 대사처럼.


“하지만 유의해야 할 점이 하나 있네. ∙∙∙ 언젠가 과학과 형이상학이 발전하면, 왜 하나의 실재가 이런 두 개의 상이한 측면을 허용하는지에 대한 이론이 등장할 수도 있겠지.” (82p)


기능주의는 굉장히 영리한 발상이지만, 역시 충분한 신경과학의 연구 결과 없이는 성급한 판단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수 실현가능성으로 이름 붙여진 기능주의의 한 속성은 위험하다. 인간이 느끼는 통증과 책에 나오는 무지개송어가 느끼는 통증은 모두 통증 완화를 위한 유사한 행동을 불러일으킬지 모른다. 하지만 인간이 느끼는 통증과 무지개송어가 느끼는 통증이 정확하게 동일하다고 어떻게 확신하는가? 하다못해 인간이 못에 찔려서 아플 때랑 칼에 베여서 아플 때랑 같은 통증이겠는가? 즉 특정한 정신적 상태는 여러 신경적, 물리적 토대 위에서 실현될 수 있다는 주장은 틀렸을 수도 있다. 아직 정신적 상태와 신경 상태의 일대일 대응에 대한 가능성은 남아있다. 오히려 엄밀하지 않은 각종 ‘기능’에 대한 단어들이 논의를 모호하게 만들고 있지는 않은가?


속성 이원론과 이중측면 이론은 논의하기가 더 복잡하다. 속성 이원론에 대해 논하려면 3번 질문으로 넘어가야 한다. 비물질계인 영혼이 실존함을 알아내려면 물질계와 비물질계를 연결할 수 있는 실험 내지 연구 방법에 대해 알아야 하는데, 아직 명쾌하게 이 관계를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내가 아는 한 없다. 이중측면 이론은 그냥 현재 지식의 한계를 잘 표현한 하나의 설명에 불과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답을 주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알고 있는 것은 이 정도다, 같은 거.


잠깐 짚고 넘어가자면, 나는 ‘학계’의 힘을 안다. 여러 학자들이 모여서 의견을 공유하고 논문 발표를 통해 갑론을박을 펼침으로써 하나의 학설이 점차 주류가 되고, 정설이 되어가는 과정이 굉장히 합리적이고 강력한, 올바른 지식을 얻어내는 방법이라는 사실을 안다. 그래서 동일론이 철학계에서 폐기되어가고 있다면, 그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나의 앞선 논의들은 내가 학계를 뛰어넘는 천재라는 주제넘은 생각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그저 단지 이 책 한 권을 읽고 드는 생각들을 1차적으로 적어본 것뿐이다. 이런 궁금증들을 바탕으로 앞으로 훨씬 더 공부를 많이 해야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아무튼 다시 돌아와서, 5번 문제는 자유의지의 실재에 대해 다룬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도덕적 책임 때문이다. 인간에게 죄를 물을 수 있기 위해서는 고의성이 성립돼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본성이 말해주는 상식이다. 만약 자유 의지는 허상에 불과하고, 사실은 인간의 모든 행동은 수많은 요인에 의한 필연에 불과하다면, 심각한 범죄자들을 포함해서 우리 모두는 우리의 모든 행동에 대해 면죄부를 얻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 명제조차도 부정될 여지가 있긴 하다.) 사실 나에게는 자유의지가 중요한 이유가 이것 말고도 하나 더 있다. 자유의지의 존재는 ‘신은 선한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굉장히 중요한 단서 중 하나였다. 인간에게 죄를 지운 신의 책임을 왜 물을 수 없는가에 대한 오랜 의문을 풀 수 있는 열쇠가 자유의지에 대한 논의였다. 자유 의지에 대해 논하려면 먼저 도대체 자유 의지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부터 논해야 한다. ‘의지’란 무엇이며, 그것이 ‘자유롭다’는 것은 또 무슨 뜻인가?


이 책은 비록 자유의지에 대해 아주 깊은 논의를 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어떤 논점들이 다루어져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빠짐없이 짚어 나가는 것 같다. 이 지점에서 조나단 에드워즈의 <의지의 자유가> 아주 잠깐 언급된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자유를 ‘욕망하는 바를 할 수 있는’ 자유로 본다. 그는 그 ‘욕망’은 어디에서 왔는지 묻는 질문에 대해서는 수많은 환경적 요인, 과거의 경험들, 그리고 때로는 신의 직접적인 개입으로부터 답을 찾는다. ‘더 읽어보기’에서 <의지의 자유>를 고전적 양립론의 진수라고 소개하는데, 정말 이 책은 의지의 자유는 하고자 하는 바를 할 수 있는 자유라는 사실을 철저하게 논증한다. 다만, 더 연구를 해보고 말을 해야겠지만, 도덕적 불능과 자연적 불능을 철저하게 구별하는데 실패한 것 같고, 따라서 인간이 왜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지에 대한 만족스러운 설명을 제공하지 못한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자유의지의 실재를 논하기 전에 자유의지가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가 선행되는 것이 필수라는 점이다.


두 번째로 넘어갈 수 있는 논점은 자유의지가 뇌의 작용에 불과한 것인가 이다. 이 부분에서 꽤 긴 분량으로 리벳의 실험이 다루어진다. 리벳의 실험은 인간이 의지를 가졌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시점 이전에 이미 뇌에서 의지에 관한 신호가 발생한다는 결론을 내린 실험이다. 피실험자의 뇌에 전극을 꽂아 신호를 받으면서, 버튼을 누르게 하고 버튼을 눌러야겠다는 생각을 한 시점의 초침을 읽도록 한다. 그런데 사실, 리벳이 주장하는 바가 진실인가 아닌가를 떠나서, 리벳의 실험 자체는 과학도의 입장에서 봤을 때 어이가 없을 정도로 의미가 떨어진다. 친구들이랑 리벳의 실험에 대해 이야기해본 적이 있는데, 공통적으로 나온 반응이 (과격하게 표현해서 당사자에게는 미안하지만) “길게 말할 필요 없이 논할 가치도 없다.”는 것이었다. 자신이 의지를 가졌다고 ‘믿는 순간’에 초침을 관찰하라고 한다니, 이렇게 주관적인 지침이 어디 있는가? 과학 연구를 할 때는 피실험자에게 이런 주관적인 판단을 종용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일단 피실험자의 주관성이 개입되는 순간 오차범위는 어마어마하게 커진다. 한 번이라도 이런 종류의 실험을 기획해 봤다면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즉 리벳 실험을 통해서는 사실 얻을 수 있는 것이 없고, 이것은 자유의지가 있다는 주장, 없다는 주장 양쪽에 모두 아무런 득실을 주지 않는다.


자유의지에 대해 홈즈가 임시로 내리는 결론은 상식에 부합한다. 우리는 자유의지에 대해 논할 때 외부의 요인과 스스로의 숙고를 모두 감안해서 생각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현재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이다. 하지만 주의할 점이 하나 있다. 의지는 내 생각에 가장 착각하기 쉬운 추상적인 개념 중 하나다. 인간의 직감은 생각보다 믿을 게 못 된다. 인간이 온도와 열을 구분하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는지 생각해보라. 의지에 대해 우리가 느끼는 온갖 의식들을 아주 엄밀하게 파헤쳐서 진실이 무엇인지 밝혀내는 것이 앞으로의 과제다.


이 정도에서 책을 읽으면서 내가 느낀 점에 대해서는 마무리해야 할 것 같다. 책의 전체적인 감상은, 일단 재미있다! 그런데 이 재미는 홈즈가 주는 재미는 아니다. 기본적으로 이 책은 입문서라고 해도 철학책이지 추리 소설이 아니다. 셜록 홈즈의 기막힌 추리가 주는 카타르시스는 이 책에서는 느낄 수 없지만, 사실 그것이 당연하다. 홈즈라는 캐릭터를 도입됨으로써 논의의 전개를 매끄럽게 따라갈 수 있게 되고, 종종 소소한 재미를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홈즈와 왓슨의 역할은 충분한 것이다. 오히려 맨 처음에 말했듯이, 영혼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으로부터 파생되는 심리철학의 다양한 질문들을 간명하게, 그러나 중요한 부분을 놓치지 않고 꼼꼼하게 소개하는 작가님의 철학 세계를 조금이나마 맛볼 수 있는 것이 진정한 책의 재미다! 책의 내용들 자체는 깊게 파고들면 절대 쉬운 내용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 책에서 다루는 개론적인 논의들만큼은 우리 모두가 즐거운 마음으로 함께 책 속을 여행할 수 있게 해 주기에 충분할 정도로 설명이 잘 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의 또 다른 흥미로운 점은 등장 인물들이 대부분 실제 학자들이라는 점이다. 사실 처음에는 잘 몰랐는데, 읽을수록 여러 논제에 대해 각자의 입장을 들고 오는 등장 인물들이 허투루 만들어진 것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마지막의 ‘더 읽을거리’ 부분을 보니 등장 인물들이 쓴 책이나 논문의 목록이 나열되어 있었다. 더욱이 작중에서 심리철학자들의 학술 모임인 <인간연구>도 가톨릭대 산하 연구소에서 발간하는, 실제로 존재하는 저널의 이름이었다.


당연하게도, 이 책에서 아마 독자가 궁금해하는 모든 것에 대한 답을 제공하지는 않을 것이다. 한 때 세간의 화제가 되었던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고 정의가 무엇인가에 대한 절대적인 정답을 알게 된 사람이 있었던가? 그 책은 지금까지 철학사에서 논의되어온 정의에 대한 다양한 개념을 잘 풀어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책이었다. 마찬가지다. 철학자가 된 셜록 홈즈의 모험을 엿본다고 해서, 우리는 영혼의 존재와 우리의 갈 길에 대한 궁극적인 답을 얻지는 못한다. 단지 그 답을 얻기 위해 몸부림쳤던 여러 천재들의 흔적을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 다음은 다시 독자의 몫이고, 인류 전부의 몫이고, 또 후대의 몫이다.


여담이지만, 작중에서 홈즈에게 형이상학적 탐구를 그만둘 것을 권유한 해밀턴 목사가 사실은 모리아티 교수였다는 전개는 꽤 충격적이었다. 작가님께서 어떤 의도를 가지고 이런 전개를 기획하셨는지는 섣불리 판단하지 않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의 개인적인 경험을 토대로 지극히 주관적인 한 마디를 보태자면, 해밀턴 목사의 정체가 드러나는 장면은 이성이 느끼는 목마름을 해결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는 사람에게 신을 만나면 다 해결되는데도 무의미한 노력을 하고 있다고 말하며 그 말을 듣는 사람에게 큰 상처를 주는 몇몇 기독교인들의 모습과 닮았다. 과학과 형이상학을 통해서는 결국 신의 존재와 그 성품, 인간의 존재 목적이나 가치에 대한 궁극적인 답을 못 얻을 지도 모른다.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인간이 사용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신과 인간과 세계와 그 너머의 가치에 대해 치열하게 탐구하는 것이━신이 있다면━오히려 그저 자신을 맹신하는 것보다 진정으로 신을 기쁘게 하는 일일 수도 있지 않을까.


“글쎄…어떤 초자연적인 힘 때문이지 않겠는가?” … “왓슨, 우리는 ‘초자연적’이란 표현이 그동안 얼마나 많은 것을 덮어버렸는지를 알아야만 하네!” (108p)


마지막으로 혹시 이 서평을 기독교인들이 읽게 된다면, 나를 오해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기독교를 무너뜨리고 싶어 안달 난 사람이 아니다. 에끌툰에서 러스트 작가님이 연재하시는 ‘요한복음 뒷조사’의 한 대사처럼, 나는 마지막으로 하늘을 향해 피켓을 든 걸지도 모른다. 나는 신이 있기를 바란다. 한 사람 한 사람을 넘치게 사랑하고, 선하며 동시에 정의로운 신이 있기를 바란다. 하지만 단지 진실이 나의 바람과는 다를 수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무엇이 진실인지 알고 싶을 뿐이다.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날이 오기를 희미하게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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