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 『한 시골뜨기가 눈떠가는 이야기』 출간안내

새물결플러스
2020-10-26
조회수 1607

책소개

이 책은 역사학자 이만열 교수가 신앙과 민족과 역사에 대해 눈떠가는 과정의 이야기다. 주일학교에서 신앙의 눈을 뜨고 이후 민족과 역사에 대해 차례로 열려가는 과정의 이만열 교수를 본문에서 만날 수 있다. 신군부에 의해 해직된 1980년대부터 지금까지 약 40여 년 동안 꾸준히 매일 밤 그날의 일기를 쓴다는 저자의 오랜 습관은 성실한 기록자라는 세간의 평가를 실감케 한다. 이 책은 저자의 젊은 시절의 그 세밀한 기억과 기록의 산물이다.

역사학자 이만열의 첫 산문집 『한 시골뜨기가 눈떠가는 이야기』의 개정판인 이 책은 1990년대 중반까지의 그의 ‘삶과 생각’을 정리한 것이다. 1장 “내가 자라고 공부해온 길”은 이번에 새로 썼다. 이 책의 출간 계기가 된 해직 이야기 2장 “쑥스러운 이야기”는 그대로 두었고, 이만열 교수의 생각의 일면을 보여주는 3-4장 “병을 만든 시대”와 “빈방의 불을 끄고” 부분은 그 무렵 KBS와 CBS에서 방송한 칼럼 몇 개를 추가했다. 평소 존경하는 분들에 대해 쓴 5장 “내가 만난 사람들”은 학술논문에서 본격적으로 다룬 박은식과 신채호는 제외하고 그 시기에 영향을 받은 몇 분을 더 추가했다. 이만열 교수의 책에는 그와 인생 여정을 같이한 동시대인들의 교우기가 증언 삼아 실리는데, 이번에는 복음주의권에서 30여 년 이상 뜻을 같이한 강경민 목사가 나섰다. 이 시대의 스승으로 존경받기에 충분한 학자 이만열의 인생 전반부를 자전적으로 다룬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화두는 신앙, 역사, 민족이다. 독자들은 이 세 가지 화두를 배경으로 절대자의 섭리에 대한 신뢰, 수많은 인간관계에 대한 애정, 정의로운 사회 건설에 대한 소망과 신념 등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그의 삶과 생각을 통해 한 시대를 뛰어넘는 역사의 기록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지은이 소개

지은이 | 이만열

1938년, 경남 함안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사학과와 동대학원(문학박사)을 졸업했고, 합동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1970년부터 2003년까지 숙명여대에서 한국사학과 교수로 있었으며, 1981년부터 몇 년간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 방문교수 자격으로 한국교회사 자료를 수집했다.

문화재위원회 근대분과 위원장,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소장, 「복음과상황」 공동발행인,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위원장(초대), 한국사학회·한국사학사학회·도산학회 회장, 독립유공자 공적심사위원장, 남북나눔운동 연구위원장,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소장 및 이사장, 외국인 근로자를 위한 희년선교회 대표, 함석헌학회 회장, 김교신선생기념사업회 회장,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숙명여대 명예교수·남북역사문화교류협회 이사장·상지학원 이사장으로 있다.

연구서로 『한국사 대요』, 『삼국시대사 강좌』, 『한국문화론 특강』, 『한국 근대 역사학의 이해』, 『단재 신채호의 역사학 연구』, 『우리 역사 5천 년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한국 근현대 역사학의 흐름』, 『역사, 중심은 나다』, 『한국기독교와 역사의식』, 『한국기독교와 민족의식』, 『대한성서공회사 I, II』(공저), 『한국기독교 수용사 연구』, 『한국기독교와 민족통일운동』, 『한국기독교 의료사』, 여행기로 『이만열 교수의 민족·통일 여행일기』, 『이만열 교수의 기독교 유적 여행일기』와 산문집으로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 『잊히지 않는 것과 잊을 수 없는 것』 등이 있다.





차례

 

개정판 서문

초판 서문



1장. 내가 자라고 공부해온 길

소 먹이던 시절: 초등학교 시절

고향을 떠나다: 중고등학교 시절

서울로 진출하다: 초기 대학 생활



2장. 쑥스러운 이야기

신군부의 등장, 그리고 해직

4년간의 외출

사람, 사람, 사람들

외부 지원으로 계속된 연구 생활

용기가 필요한 시대

합동신학교에서 공부하다

두 차례의 미국행

하나됨의 열매

오늘날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해직 4년 1개월



3장. 병을 만든 시대

내가 겪은 1984년

4·19와 5공 비리, 훼절이 난무한 시대

민주화 과정, 기독교는 무엇을 했는가?

없앨 관행과 세워야 할 정의

악순환의 고리

이제 분노를 삭이고

잠잠할 때와 말할 때

‘핵 카드’에 대한 투명성 논란

통일을 위해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노블레스 오블리주’와 병역 기피



4장. 빈방의 불을 끄고

땀 흘리지 않은 소득

천년제국 로마를 삼킨 퇴폐·향락 문화

지금 자본주의 얼굴은?

빈방의 전등을 끄는 마음

절제하는 삶

결혼 풍속도, 이래도 좋은가?

다산 정약용 선생의 민본정신

통일 베트남의 교훈과 지도자 호찌민

IMF 위기를 초래한 책임

‘한국 자본주의’에 대한 반성

‘금모으기 운동’을 보면서

자본주의 정신의 산업화



5장. 내가 만난 사람들

역사의식과 살아 있는 사람

단군 문제를 다시 생각하다

깊은 사랑을 ‘엄격함’으로 표현한 아버지

등잔불 밑에서 성경 이야기를 들려주던 어머니

민족주의의 씨앗을 심어준 스승, 문성주

시골교회를 섬긴 학자풍의 유봉춘 목사

민족의 큰 스승, 백범 김구

미국 속의 한국인과 다민족 사회, 그리고 안창호

현실에 집착하지 않는 선견자, 유일한

한 역사학도가 만난 함석헌 선생

분단의 아픔을 짊어지고 간 장기려 박사

한석희 선생 추도사

한국 기독교사 연구에 새 장을 마련해준 어른, 한영제 장로

고영근 목사님의 자료 간행에 부쳐

‘삶의 현장’을 직시토록 안내한 ‘복음주의자’, 존 스토트


교우기





본문 중에서

그해 여름방학 동안 학교에서는 퇴비 증산을 위해 풀을 쌓아 썩혀 거름을 만드는 시합을 각 동리 대항으로 진행했다. 8월 초까지 우리 동네 학생들이 가장 큰 풀더미를 만들어 개학하면 우리가 단연 우승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던 8월 초 어느 날 우리 동네 앞 큰 개울가에 미군이 부산스럽게 포대를 쌓는 모습이 보였다. 지금까지 승리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이게 무슨 일이지, 우리는 미군의 부산한 움직임에 호기심을 품었다. 멀리서 ‘쿠웅쿵’ 하는 대포 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렸다. 그날 오후 아버지는 내게 동생과 조카를 데리고 의령의 자형 집으로 피난을 가라고 당부했다. 갑작스럽게 피난길에 오른 우리는 그날 군북-의령 간 도로에서 국군 패잔병들이 대오도 없이 하나둘 총을 거꾸로 메고 남인수의 <아 신라의 달밤>을 처량하게 부르면서 퇴각하는 모습을 보았다. 이렇게 시작된 피난 생활은 의령군, 진양군, 함안군 지역을 돌아다니며 9월 말까지 계속되었다.

-1장 “내가 자라고 공부해온 길”에서

 

1980년 7월부터 1984년 8월까지 나는 교수직을 사임한 채 소위 ‘해직교수’로 있었다. ‘해직’ 당한 이유는 아직도 분명히 모른다. 당시 사직서를 강요했던 치안 본부의 한 수사관이 나에게 한 말이 생각난다. “길을 가다가 갑자기 옆에서 날아온 영문 모를 돌멩이를 맞았다고 생각하세요.” 그에게 주어진 임무가 어떤 형편상 불특정한 몇 사람에게 사표를 강요하여 희생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음을 우회적으로 암시한 말이다. 이런 암시를 근거로 다른 사람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나, 나는 내 해직에 정도 이상의 의미와 해석을 부여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전 해(1979년) 10월 26일 유신정권의 대명사 박정희 대통령이 살해된 후 신군부가 정권을 가로채려는 공작을 노골화하고 있는 정황 속에서 해직되었다는 것이다.

-2장 “쑥쓰러운 이야기”에서

 

6월 중순에 해직교수 복직 조치가 발표되었다. 1980년 7월에 해직된 이래 만 4년 만이었다. 늘 기도하던 문제였으나, 막상 부닥치고 나니 오히려 담담한 심경이었다. 옆에서 축하해주는 소리가 이상하게 들릴 정도였다. 많은 분이 해직교수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었음을 느꼈고, 고마움과 함께 ‘해직과 고난은 우리만 당한 것이 아니구나. 우리의 고통에 동참해주신 분들이 많았구나’ 하고 충격을 받았다. 짧지 않은 기간이었으나 내 인생의 폭과 깊이, 가치와 의미를 새롭게 부여하던 때였음이 틀림없다. 하나님께서 이 고난마저도 나에게 축복으로 주셨음을 깊이 알 수 있었다. 고난의 참 의미를 느끼는 시간이었다. 이 기간에 하나님께서는 나를 가족과 함께 미국에 건너가 한국교회사 관련 기본 자료를 섭렵하게 해주셨고, 이로 인해 앞으로의 학문 연구 방향에 새 지평을 열어주셨다. 84년 여름, 성서공회의 일로 미국에 다시 갔다. 그때는 한결 가벼운 마음이었다. 많은 분께 분에 넘치는 대접을 받았다. 이 역시 ‘해직’이 가져다준 보잘것없는 보상이라 생각한다.

-3장 “병을 만든 시대”에서

 

절제를 거론하면서 간과하기 쉬운 점은, 절제를 언어·행동·물질과 관련시키기는 해도 시간과 정력의 절제와 관련시키지 않는다는 점이다. 시간과 정력은 곧 인간의 생명이다. 생명은 시간과 힘으로 계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시간과 정력의 낭비는 곧 생명의 낭비라고 할 수 있기에 시간과 정력의 관리는 절제의 가장 중요한 과제다. 그것을 선한 의지의 실현과 봉사와 희생, 자신과 사회의 성장을 위해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권력이나 재력을 가진 사람이 자신이 가진 그 힘을 절제한다면 얼마나 추앙받을까. 절제는 자신의 야망과 힘을 다 써버리지 않고 그것을 통제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여백(여유)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절제는 내가 세울 수 있는 공도 다른 사람의 몫으로 남겨놓을 줄 안다. 우리 세대가 응당 개발할 수 있는 산천도 후손들의 삶의 터로, 창의의 시험장으로 유보해놓을 줄 알아야 한다는 생각 또한 현재를 절제할 줄 아는 미덕이다. 후손에게 물려줘야 할 바로 그 산천이 공해와 환경파괴의 희생물이 되어가고 있다. 그 주범은 향락과 사치, 무절제와 낭비로 표현되는 과소비다. 공해와 환경파괴로부터 삶의 터와 후손들의 보금자리를 보호하는 길은 자원절약이라는 ‘절제’의 묘약밖에는 없다는 사실이 우리의 현재 결론이다.

-4장 “빈방의 불을 끄고”에서

 

한국교회는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가령 인권과 소외, 핵무기, 자본과 노동, 노사 관계, 결혼과 성차별, 동성애와 낙태, 전쟁과 폭력, 군부독재와 민주화, 사회적 부패 등의 문제에 대해서는 거의 눈을 감고 있었고, 젊은이들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교회 젊은이들의 문제의식에 제대로 답하지 못하던 상황에서 1980년대 중반에 이르러 나는 존 스토트의 『현대사회문제와 기독교적 답변』이란 책을 접했다. 이 책에 의해서 그리스도인의 사회의식이 새롭게 개안되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 많은 기독교 지성인들이 의식적으로 눈감아버렸던 문제들에 대해서 존 스토트는 회피하지 않고 과감하게 정면 대결로 수용하여 성경과 역사에 근거하여 고민하고 씨름하며 문제 해결을 위해 몸부림쳤다. 그 뒤에도 존 스토트의 이런저런 저술들을 읽었지만 나는 『현대사회문제와 기독교적 답변』 하나만으로도 그에게 큰 빚을 진 자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5장 “내가 만난 사람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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