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 『시네마 에피파니』 출간안내

새물결플러스
2021-06-30
조회수 454

책소개

아, 이거구나, 영화를 보다가 눈이 번쩍 뜨이는 순간, 머리와 가슴이 텅 비면서 서늘한 바람이 스치는 순간, 부조리한 시대와 싸워야 한다는 다짐을 주는 순간, 눈물 흘리며 치료받는 그 깨달음의 순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 깨달음의 순간이 며칠, 아니 평생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을 수도 있다. 영화를 보면서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손에 쥔 듯한 깨달음의 순간을 얻는다. 이 책은 그 순간을 ‘시네마 에피파니’라는 용어로 호명한다.

영화는 에피파니의 순간을 통해 유한한 인간이 무한하여 형용할 수 없는 그 무엇을 깨닫게 하는 귀중한 예술이다. 김응교 교수는 신학과 문학의 사유인 에피파니를 영화에 접목시킨다. 종교적 깨달음을 주는 에피파니의 순간, 역사와 사회를 깨닫게 하는 혁명적 순간, 사라지는 것들의 선연한 아름다움을 깨닫게 하는 시네마 에피파니의 순간을 포착한다. 1991년부터 2021년까지 30년 동안 저자가 본 무수한 영화 중에 이 책에 담긴 30여 개의 작품은 시대를 뛰어넘는 질문과 메시지를 던진다. 늘 대지에 발붙인 글을 쓰고, 역사의 현장에 직접 찾아가고 목소리 내기를 마다치 않는 저자는 이번 책에서도 영화를 통해 오늘 이 땅의 현실을 짚어보는 일을 잊지 않는다. <택시 드라이버>에서 괄시받는 이의 분노를, <햄릿>에서 애도의 심리학을, <공자>에서 시진핑의 중화주의를, <신문기자>에서 아베의 도금한 민주주의를, <레미제라블>에서 숭고미의 반복을, <보헤미안 랩소디>에서 빈자, 난민, 동성애자의 이웃을, <기생충>에서는 자본주의를 해체하는 공간의 고현학과 함께 카프카 소설의 『변신』을 대입해본다. 특히 명작과 수작뿐만 아니라 국뽕 영화를 국가 주도와 국민 주도로 분류하는 2부의 도입부와 명작은 아니지만 좋고 재밌는 ‘조코잼 영화’라는 별칭을 붙인 <말모이>에 대한 글은 이채롭다. 이 책의 시네마 에피파니 순간이 분명 독자 여러분에게도 어떤 깨달음의 순간을 선사할 것이다. 영화를 보는 데 새로운 시선 하나를 더하고 싶은 독자들에게도 꽤 흥미로운 독서가 될 것이다.

 



지은이 소개

지은이 | 김응교

수락산 기슭에서 시와 문학평론을 쓰는 서생이다. 가끔 시사회나 조조영화를 홀로 보고 영화를 생각하며 수락산 산길 따라 걷다가 시냇물가에 앉아 영화평론을 끄적인다.

국제영화비평가연맹(FIPRESCI) 소속 영화평론가이고, 숙명여대에서 영화로 공부하는 <세계문학과 철학>을 강의하며, ‘모기영’(모두를 위한 기독교 영화제) 이사로 있다.

시집 『씨앗/통조림』, 『부러진 나무에 귀를 대면』, 산문집 『그늘: 문학과 숨은 신』, 『곁으로: 문학의 공간』, 『질병과 슬픔 앞에서 손 모아』, 『일본적 마음』, 세 권의 윤동주 이야기 『처럼: 시로 만나는 윤동주』, 『나무가 있다: 윤동주 산문의 숲에서』, 『서른세 번의 만남, 백석과 동주』를 썼고, 평전 『좋은 언어로: 신동엽 평전』, 번역서 다니카와 슌타로의 『이십억 광년의 고독』 등을 냈다.

 



차례

 

1부

죽여주는 캐릭터, 윤여정

<화녀>, <죽여주는 여자>, <미나리>

2020 <69세>

10초의 에피파니

2020 <아웃브레이크>, <컨테이전>, <월드워Z>, <킹덤>

팬데믹 영화에서, 오리엔탈리즘은 사라질까

2019 <기생충>과 카프카 소설

공간의 고현학과 카프카 소설

2019 <신문기자>

아베 ‘도금 민주주의’에 맞선다

1992 <시티 오브 조이>

만남의 기쁨과 어떤 시혜의식

1985 <보헤미안 랩소디>

마이 프렌드와 니체

1980 <택시운전사들>

다중의 단독자들

1976 <택시 드라이버>

마틴 스코세이지와 괄시받는 이의 분노

1970 <기독청년 전태일>

그 밀알 한 알

 

2부

국가 주도 국뽕 Vs 다중 주도 국뽕

1960 <싸이코>

히치콕 판타지

1954 <디엔 비엔 푸>

끈질긴 항전과 지루한 패배

1944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

명랑한 폭력과 장르 파괴

1942 <말모이>

조선말 큰사전과 조코잼 영화

194X년 <이방인>, <페스트>

부조리에 맞서는 카뮈의 저항

1940 <글루미 선데이>

우울한 부다페스트

1933 <암살>

속사포와 (애국)계몽 오락영화

1920 <연인>

지워지지 않는 원초적 사랑

1917 <1917>

우연과 현실의 연속

 

3부

1895 <명성황후>

문화콘텐츠, 영화와 뮤지컬

1877 <라스트 사무라이>

사라지는 사무라이

1815-1832 <레미제라블>

숭고의 데자뷰

1789 <마리 앙투아네트>

미완성의 혁명과 불행한 여성

1771 <괴테>

질풍노도와 젊은 베르터의 고뇌

1750 <미션>

두 사람의 표정, 그리고 엔니오 모리꼬네

1637 <사일런스>

시네마 에피파니

12세기 <햄릿>

애도의 심리학

1182-1226 <프란체스코>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BC 551-479 <공자>

춘추전국시대와 시진핑 중화주의

BC 1010-971 <다윗 대왕>

다윗에 대한 네 가지 기억

 

고맙습니다

 



본문 중에서


두 가지 이유로 이 영화를 피했다. 첫째는 남이 보는 영화는 안 보려 하는 엉뚱한 경향 때문이다. 둘째는 그 지겨운 계투, 계급투쟁(class struggle)을 어떻게 표현할지 생각만 해도 짜증 났다. 망치로 때리고 부수지 않을까. 그 이상한 습관, 짜증을 뚫고 영화를 봤다. 피식피식 웃으며 영화를 봤다. 영화가 끝나고 한참 멍했다. 그냥 놀랐다. 계급 문제를 저렇게 재밌게 표현하다니.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얼마나 어렵고 근엄한가.…영화 <기생충>은 빈부격차와 욕망이라는 문제를 유머, 공포, 비극 세 가지 미학으로 정리해냈다. 세 가지 미학은 따로 떨어져 있지 않고, 서로 섞여 미묘한 충격을 만들어낸다.

_<기생충>에서

 

이 영화의 첫 노래는 “Somebody To Love”이고 마지막 노래는 “We are The Champion”이다. 마지막 라이브 에이드에서 모든 주변인은 하나가 된다. 난민의 후예였던 디아스포라 아버지와 가족도, 동성애자인 짐 허튼과 상처 받은 애인 메리도 함께 서서 공연을 응원한다. 메리와 허튼은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프레디의 어머니는 숨을 가쁘게 쉰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수많은 관중이 환호하며 공연에서 하나가 된다. 그들은 모두 노예가 되고 싶지 않고, 폭군이 되고 싶지 않은 지점에서 친구가 된다.

_<보헤미안 랩소디>에서


문득 “아빠가… 손님을 두고 왔어”라며 흐느끼던 택시운전사의 대사가 떠오른다. 나는 무엇을 두고, 무엇을 모른 척하고, 무엇을 외면하고 앞으로만 가고 있는가. “아빠가 손님을 두고 왔어, 아빠가 손님을 두고 왔어.” 막내와 걷는데 자꾸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눈물로 끝내면 안 된다. 이 사건을 일으킨 살육자들을 찾아내야 한다. 다시는 이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이름도 쓰기 싫은 전두환과 그 추동 세력의 행동에 대한 책임과 벌을 물어야 한다. 절대로 눈물로 얼버무려서는 안 될 일이다. 아들 앞에서 눈물 보이면 안 되는데, 아유 덥다, 눈시울에 괴인 땀인지 눈물인지를 훔쳐냈다. 아빠는 손님을 두고 오고 싶지 않았어, 아빠 손님들 태우고 싶었어. 세상을 구원하는 것은 오래 참은 눈물과 지엄(至嚴)한 기억이고, 오래 묵은 슬픔은 가끔 사랑으로 다가온다.

_<택시운전사들>에서

 

선과 선을, 위와 아래를 오가며 현실과 판타지를 오가는 원칙, 그 사이에 히치콕은 머뭇거림과 공포를 사용한다. 공포를 느끼면서 관객은 그의 판타지 세계로 들어간다. 그 판타지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오는 순간, 관객이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 지겨웠던 일상이 전혀 새로운 공간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히치콕이 노리는 것은 바로 영화를 본 다음 순간이다. 그다음 순간은 히치콕 영화를 보는 사람마다 모두 다른 실제 세계를 깨닫는 시간일 것이다.

_<싸이코>에서

 

사람들은 근본과 단절되는 순간 불안을 느낀다. 사람들 무리에 연결되지 않으면 불안에 휩싸인다. 관계와 고독이라는 두 가지 양극에서, 고독을 즐기는 삶을 연습하지 못한 사람들은 정신없이 관계를 찾는다. 소설 『페스트』에서도 고독에 익숙지 못한 사람들은 관계를 찾아 술집을 찾고, 교회를 찾고, 마지막에는 광장의 혼돈을 찾는다. 지금 코로나 시대에 소설과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단절을 못 견디는 사람들이 광장으로 나가고, 술집에 모이고, 교회에 모여 소리 높여 서로 존재를 확인하며 안심하는 상황을 목도한다. 단절되면 불안해한다.

_<이방인>, <페스트>에서

 

최동훈 감독은 절대악을 영화 <레미제라블>처럼 자살로 마무리하지 않고, 죽인다. 현실은 그렇지 않은데 죽인다. 죽여 버린다. 그래서 이 영화는 조금 무섭다. 어떤 이들에겐 분명 난데없는 공포영화로 엄습할 것이다. 그러나 주의해서 이 글을 읽어주시기를 바란다. 나는 지금 연좌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독립군의 자식 중에도 아비의 뜻과 달리 비루하게 사는 사람들이 있다. 친일파의 후손인데도 전혀 다른 위인들이 있다. 다만 기억하자고 말할 뿐이다. 조금의 양심이 살아 있다면 말이다. 허구적인 역사 영화는 허구로만 본다면 아무 의미가 없다. 이 영화는 여러 번 “잊지 말라”고 권한다. 이 장치가 허구를 현실로 끌어당긴다.

_<암살>에서


이 죽음의 서열화는 곧 차별의 서열화가 죽은 후에도 이어지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이러한 태도는 당시의 봉건적 세계관을 나타내는 구도로는 당연할지 모른다. 그런데 은연중에 그 봉건적 세계관이 오늘날 다시 재현되면서 그 서열을 숭엄(崇嚴)하게 하는 것이다. 명성황후와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궁녀의 혼령들이 서서히 걸어 나오며 애국주의를 노래한다. 이때 가장 크게 애도받는 명성황후가 중앙 전면부에 위치하고 나머지 죽음은 부차적으로 따라 나온다. ‘죽음의 서열화’가 극명하게 미화되는 순간이다. 우리는 어느덧 애도해야 할 사람과 애도하지 않아도 될 죽음을 구별하는 것이다. 가령, 2009년 노무현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했을 때 그들에 대한 애도는 더욱 거대해지고, 용산철거민 사건으로 냉동고에 누운 호모 사케르(homo sacer) 5인의 주검은 애도받지 않아도 될 존재로 잊혔다. 마치 차별받던 흑인은 죽어서도 차별받는다는 구도를 담론화하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_<명성황후>에서

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