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 『예수와 성전』 출간안내

새물결플러스
2021-10-28
조회수 1299

책 소개


본서는 역사적 예수가 스스로를 종말론적 새 성전으로 이해하는 가운데 특별히 가난한 자들에 대한 구제, 치유와 축귀 사역, 죄인들과의 식사 등을 통해 성전 됨을 구현했다고 주장한다. 최근 신약신학의 주요 동향 중 하나인 유배와 회복 및 성전신학 관점에서 역사적 예수 문제에 접근하기를 원하는 독자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다.




 

출판사 서평


지난 200년 간 세계 신약신학계의 핵심 과제는 “역사적 예수”의 진짜 모습을 탐구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예수란 존재는 누구인가? 그는 하나님인가, 사람인가? 신적 존재라면 어떤 종류의 특별한 존재이고, 사람이라면 어떤 인간인가? 나아가 역사적 예수는 실재했는가? 그의 말과 행동의 핵심 의미는 무엇인가? 그에 대한 전승과 기록은 신뢰할 만한 것인가? 등등을 둘러싼 수많은 갑론을박이 있었고, 이 질문은 현재도 계속되고 있다.

오랜 고민과 토론 끝에 20세기 말부터 역사적 예수 연구 학자들은 예수의 진짜 모습에 접근하려면 그를 제2성전기라 불리는 유대교 맥락에 놓고 이해해야 한다는 데 대체로 합의하게 되었다. 신약성서가 제시하는 예수의 모습은 제2성전기 유대교와 연속성 및 불연속성을 갖는다는 것이 명확해졌기 때문이다. 본서의 저자는 특별히 제2성전기에 발생한 “성전 반대 운동”이란 관점에서 역사적 예수 문제에 접근하는 것이 예수를 이해하는 데 매우 유용한 방법이 될 것이라고 제안한다.

“성전 반대 운동”이란 당시 부패한 제사장들이 지배하던 제2성전 권력의 횡포와 타락에 맞서 스스로를 하나님의 종말론적 성전으로 간주한 운동을 지칭한다. 구체적으로 자신들을 하나님의 종말론적 참 성전으로 간주한 「솔로몬의 시편」 배후에 있는 공동체나 쿰란 공동체를 예로 들 수 있으며, 세례 요한이 주도한 운동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공히 당시의 성전이 타락해서 본래의 기능을 상실했으며 따라서 하나님의 구원을 담아낼 새로운 성전이 필요하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사실 이런 생각들은 초기 기독교, 특히 바울 서신에서도 강하게 나타난다. 초기 기독교 역시 하나님의 구원사에서 유대교의 성전 기능이 종료되었으며 이제 사람의 손으로 건축하지 아니한 새로운 종말론적 성전이 (예수와 성령에 의해) 건축되었다는 강한 자의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초기 기독교는 쿰란 공동체 등과 달리 기존 유대교 성전 기능의 과격한 폐지를 추구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 역사적 예수는 세례 요한과 초기 기독교를 잇는 “가교”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가 부패한 예루살렘 성전을 상대로 시위한 “성전 정화” 행위야말로 그가 당시 발흥하던 “성전 반대 운동”의 맥락에 서 있었다는 것을 실증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역사적 예수는 세례 요한 및 초기 교회와의 연속성을 담보한다.

그러나 동시에 역사적 예수는 제2성전기의 여타 성전 반대 운동과 불연속성을 노정하는데, 그것은 당시의 성전 반대 운동이 하나님께서 지으실 새 성전이 종말에 비로소 건축될 것으로 이해했던 반면, 예수는 자신의 생애와 사역 속에서 “이미” 새 성전이 출범했음을 강력하게 선포하기 때문이다. 곧 예수는 자신의 설교와 사역 속에서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새 성전 건축이 이미 시작되었으며, 나아가 자기 자신을 바로 그 새로운 성전으로 간주했다. 이러한 자기 이해를 바탕으로, 예수는 새로운 종말론적 성전 건축이 벌써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구체적 표징으로서 가난한 자들에 대한 구제, 무소유 공동체의 추구, 축귀와 치유, 죄인들과의 식사 교제 등을 강조했다. 사실상 이는 구약성서에서 성전이 수행하던 기능을 예수가 오롯이 자기 자신에게 수렴한 행위였다. 이로써 예수는 스스로를 종말론적 새 성전으로 자리매김한다. 본서의 백미이자 가장 큰 공헌은, 예수의 구제와 무소유 공동체 지향 등을 구약의 성전 기능에 비춰 해석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이는 역사적 예수를 제2성전기 유대교 맥락에 비춰 이해하는 것뿐 아니라 구약성서와의 연속성이란 점에서 이해할 수 있는 강력한 통찰을 제시한다.

주지하듯, 최근 한 세대 동안 국제 신약학계는 “유배와 회복” 및 “성전”이란 화두를 조합하고 통합해서 신약성서를 일목요연하게 이해하려는 노력을 계속해왔으며, 본서 역시 그런 흐름에서 탄생한 연구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들어 한국교회에도 “성전신학”' 관점에서 성서 전반을 이해하려는 다양한 시도들이 계속 소개되고 있는 것은 국제 신약학계와 일정 부분 보조를 맞추려는 노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성전신학에 관심이 많은 독자들은 본서를 통해 기존의 책에서 미처 다 포착하지 못했던 새로운 통찰들을 만나 보는 동시에, 기성 이론과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서 더 깊은 성서 해석의 세계로 진입할 것인지 고민해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역사적 예수의 실재에 대해 변증과 의문 사이를 오가는 독자들 입장에서는 “성전”을 화두로 역사적 예수가 구약성서 및 제2성전기와 어떤 연속성, 그리고 불연속성을 띠는지를 성찰해보는 지적 즐거움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지은이 및 옮긴이 소개


지은이 | 니콜라스 페린(Nicholas Perrin)

일리노이주 휘튼 칼리지 대학원 프랭클린 S. 디어네스 부교수다. 이전에는 국제적으로 저명한 신약 학자인 톰 라이트의 리서치 조수였다. 비블리컬 신학교(펜실베이니아주 햇필드)를 공동으로 설립했으며, 런던 국제 장로 교회에서 시니어 목사로 사역했다. 마르케트 대학교에서 2001년에 Ph.D를 마쳤다. 많은 논문 외에 Lost in Transmission: What We Can Know about the Words of Jesus(Thomas Nelson, 2007), Thomas, the Other Gospel(SPCK, 2007), Thomas and Tatian: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Diatessaron and the Gospel of Thomas(SBL, 2002)를 썼고 구데이커와 공동으로 Questioning Q(SPCK and IVP, 2004)를 편집했다. 휘튼에서 그의 아내 캐미 및 두 아들 나다니엘과 루크와 살고 있다.

 

옮긴이 | 노동래

서울대학교 공법학과와 KAIST 테크노경영대학원 금융공학 MBA 과정을 졸업하고 동국대학교 경영학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동양증권 준법감시인/CRO, 녹색기후기금 (GCF) Interim 리스크 매니저를 역임했고 지금은 새물결플러스에서 편집인으로 일하고 있다. 『비즈니스 윤리와 지속 가능 경영』, 『뮤추얼 펀드 상식』, 『기업윤리 가이드』(이상 연암사)와 『최초의 7일』, 『그랜드캐니언』, 『현대 무신론자들의 헛발질』, 『아메리칸 지저스』, 『예수와 십자가 처형』(이상 새물결플러스)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차례


서문

약어

서론 성전 상을 엎다

1장 “누가 너희에게‘임박한 진노를 피하라’하더냐?”

2장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을 알지 못하느냐?”

3장 “이 성전을 헐라!”

4장 “우리의 빚을 면제하여 주소서”

5장 “주의 나라가 임하소서!”

결론 새로운 몇 가지 정리 및 새로운 몇몇 이슈 제기

참고문헌

고대 자료 및 성구 색인




 

추천사 중에서


니콜라스 페린은 예수를 “성전 반대 운동가”로 묘사한다. 이 관점으로 신약성서와 제2성전기 유대교 문헌을 읽으면 자욱했던 안개가 걷히고 수수께끼 같던 퍼즐이 맞추어지기 시작한다. 이 책은 주석적, 해석학적 난제라고 여겨지는 질문들에 대해 간결하지만 의미 있는 대답들을 제공하며, 때로는 질문 자체의 궤도 수정을 요구하기도 한다. 이 책을 열어 펼치는 순간부터 독자들은 위 질문들에 대해 무릎을 탁치게 되는 순간(Aha moment)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권영주, 한국침례신학대학교 신약학 교수

 

니콜라스 페린은 역사적 예수를 “대제사장이자 성전”으로 보자고 제안한다. 페린은 박학을 과시하지 않는 간략한 형태로 주장과 근거를 제시한다. 종교에 국한된 “성전”에 관한 기존의 이해를 교정하여 성전의 사회-정치적인 본뜻을 적절하게 드러내고, 예수와 초기 예수 운동 공동체, 바울로 이어지는 이른바 성전과 회복 종말론을 엮은 “메타내러티브”의 맥락에서 역사적 예수를 해명한다. 역사적 예수를 그려보려는 학문적 시도에 힘을 보태는 흥미롭고 유익한 연구다.

김학철, 연세대학교 학부대학 교수

 

“예수-성전” 모티프는 신약성서 신학뿐 아니라 역사적 예수 연구에 가장 중요한 주제임이 틀림없다. 매우 학술적인 역사적 예수 연구가 어떻게 신약성서의 전반적 신학과 메시지에 공헌하는지를 아주 잘 보여주는 역작이다.

류호준, 백석대학교 신학대학원 은퇴 교수

 

예수는 성전을 회복하여 종말론적인 희년을 가져올 자신을 대제사장과 성전으로 정의함으로써 이스라엘을 재구성한다. “성전이 곧 예수”라는 오래된 진리 속에 담긴 기독교의 핵심 사상을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는 특별한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윤철원, 서울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신약학 교수

 

저자가 주목하는 것은 예수의 대안적인 새 성전과 새 제사장직을 향한 비전이 희년 정신의 구현을 통한 가난한 자의 구제와 악한 영의 퇴출을 통한 영적인 성결의 회복이란 메시지로 귀착되고 그것이 결국 예수의 역사적 “행위”에 구체적인 동력으로 작용했으리라는 가설이다. 그 가설은 본서를 통틀어 매우 치밀한 분석과 풍성한 해석으로 검증되었고, 그 결과 본서는 예수 당시와 초기 기독교가 발흥하던 1세기의 성전 이해에 또 하나의 시금석을 제시한다. 역사적 예수를 탐구하고자 하는 성서학도, 신학도,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적잖은 배움과 깨우침이 있으리라 믿으며 적극 추천한다.

차정식, 한일장신대학교 신약학 교수

 

니콜라스 페린의 최근 책은 성전으로서 예수 개념을 신선하게 바라본다. 독자들은 페린의 창의적인 통찰력 및 그가 1차 자료와 2차 자료를 통제하는 데 대해 거듭 놀랄 것이다. 본서는 중요한 연구 분야에서 중대한 진전이다.

크레이그 A. 에반스, 아카디아 디비니티 칼리지 신약학 교수

 

역사적 예수를 이해하기 위한 새로운 패러다임은 다소 희귀하다. 기이하지 않으면서도 새로운 제안은 더 드물다. 본서에서 니콜라스 페린은 우리에게 그런 경이를 제공한다.

마크 앨런 포웰, 콜럼버스 트리니티 루터 신학교 신약학 교수

 

『예수와 성전』을 읽으면 마치 복음서를 처음 읽는 것처럼 복음서의 드라마를 새로운 관점에서 보게 된다. 예수가 성전의 그늘 및 성전의 빛에 비추어 고려되면 예배, 제사, 왕국 및 예전 같은 개념들이 완전히 다르게 제시된다. 본서는 신약학계에 귀중한 공헌이다.

스콧 한, 세인트 빈센트 신학교 성서 신학 교수

 

『예수와 성전』은 대담한 주장과 매혹적인 스타일로 인해 손에서 내려놓기 어렵다. 본서는 내가 기억하기로는 한 구절에 대해 알베르트 슈바이처부터 밥 딜런까지 언급할 수 있는 극소수의 책 중 하나다.

지닌 K. 브라운, 베델 신학교 신약학 교수





본문 중에서


“왜 역사적 예수에 관한 또 다른 책을 쓰는가? 우리는 이미 그런 책을 충분히 가지고 있지 않은가?”라는 질문을 받으면 나는 “아니오,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라고 답변할 것이다. 우선, 모든 탐구가 사회적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나는 역사가 전개될 때 학계의 대화, 심지어 수 세기 묵은 학계의 대화조차 우리를 어디론가 데려다준다고 믿는다. 특히 역사적 예수를 바라보는 새로운 방법을 진척시킴에 있어 나는 예수가 자신을 성전을 구현한 인간으로 보았다는 관점이 과거의 논의를 공정하게 다루고 앞으로 전개될 새로운 몇몇 논의를 위한 무대를 제공하기를 바란다. 둘째, 역사적 예수에 관한 논의가 1세기 갈릴리 사람들의 윤리적 가르침을 현대를 위한 설득력 있는 언어로 변환하고자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현시점에서 예수의 목표를 새롭게 평가하면 신선한 변환의 가능성이 커진다. 나는 예수를 성전 반대 운동의 성쇠 안에 위치시킴으로써 역사적 사실들을 올바로 다룰 뿐만 아니라 그의 생애에 관한 다양한 초점을 통합할 수도 있다고 믿는다. 나의 변변치 않은 판단으로는 마법사 예수나 사회정치적 혁명가 예수 또는 현자 예수가 아니라 대제사장이자 성전으로서의 예수가 역사적 사실에 가장 잘 부합한다. 구속사는 때때로 마법사, 혁명가 또는 심지어 메시아가 없이도 진행되었지만 아담 이래로 제사장이나 성전 없이는 결코 진행되지 않았다. 만일 역사적 예수가 자신을 성전으로 본다면─고대 유대인의 관점에서는─성전이 모든 역사를 포괄하기 때문에 예수 자신이 모든 역사를 포괄하는 셈이다. 마찬가지로─내가 아래의 논의에서 명백해지기를 바라는 바와 같이─성전이 삶의 모든 것을 포괄하기 때문에 성전으로서의 예수는 삶의 모든 것을 포용한다. 우리는 예수를 따르겠다고 고백하는 사람은 모든 역사와 모든 삶을 아우르지 못하는 관점에 만족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할 것이다. 만일 그들이 역사적 예수에게서 그런 관점을 발견했다면 그들은 운이 좋은 사람들이다.

_서문

 

이스라엘이 성전의 상태로 말미암아 당황스러워하고 그 상태에 신경을 쓰고 있을 때, 예수는 바로 이런 세상에 태어났고 바로 이런 세상에서 사역했다. 이 모든 점은 역사적 예수 이해에서 중요하지만 자주 무시되는 배경을 형성한다. 이 모든 점은 철저한 유대인이었고 따라서 사회적·정치적으로 참여하는 개인이었던 예수가 자신을 쇠약해진 성전에 대한 야웨의 응답으로 보았을 가능성을 좀 더 명확하게 제시한다. 이 제안은, 좀처럼 취해지지 않지만, 예수의 행동에 대한 피상적인 고찰에 대해서도 자연스럽게 빛을 던져주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질문할 수 있을 것이다. “언뜻 보기에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에 대한 명백한 유비로) 열두 명의 제자를 불렀고 성전 당국과 공개적으로 갈등을 빚은 1세기 유대인이 자신의 운동을 성전 관점에서 언급했을 가능성과 그렇지 않았을 가능성 중 어느 쪽 가능성이 더 크겠는가?” 내게 있어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자명하다. 이 선상에서 나는 다음과 같은 E. P. 샌더스의 말이 옳다고 믿는다. “나는 1세기 유대 팔레스타인에서 성전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고 생각한다.” 역으로, 나는 예수가 성전을 어떤 식으로든 하찮게 여겼다고 가정하는 것은 역사적 증거, 맥락, 상식에 반한다고 믿는다

_서론 성전 상을 엎다

 

확실히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셀레우코스 제국 그리고 로마 제국의 연속적인 압제하에 있던 이스라엘의 삶은 신학적으로 및 실제적으로 큰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이방인 문제”가 메시아에 대한 성찰이 발흥하기 위한 필요조건이었다고 할지라도 이 상황 자체가 충분조건은 아니었다. 고대 유대 신앙은 종교적·정치적 실재였고 따라서 이스라엘에서 이방인들을 제거하고 그럼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을 고통에서 해방시키는 것 이 중요했지만 의제의 더 상위 항목은 자주 논의되는 문제인 “진정한 이스라엘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아무튼 이스라엘은 이방인의 점령을 핵심적인 문제로 보지 않고 그것을 이스라엘이 진정한 그리고 최상의 의미에서 이스라엘이 되지 못한 데 대한 증상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았다. 1세기 유대 신앙 내에서 이 절박한 문제 에 대한 해법이 얼마나 다양하든 간에 모든 사람이 적어도 다음과 같은 기본적인 질문에 동의했다. “토라에 충실하고 따라서 야웨께 충실한 백성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의 범죄로 말미암아 성전이 더럽혀졌다고 확신한 세례 요한은 구약 성서로부터 메시아적인 환난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그는 하나님이 성전 예배의 형태를 제공해야만 하는데 자기를 통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이 일을 어디서 시작하겠는가라고 추론했다. 따라서 그렇지 않았더라면 성전에 속했을 속죄와 기도 등의 기능이 이제 자신의 후원하에 있는 공동체에 위임되었다. 하지만 요한의 성전은 평상적인 상태로의 복귀가 아니라 더 깊고 더 철저한 의로움이라는 에덴으로의 복귀 가 될 것이다. 이 사회·경제적 윤리는 하나님이 자기의 메시아를 통해 이스라엘을 방문할 때까지 잠정적인 규범이 될 터였다. 사람들이 가장 어두운 시간을 발견하는 곳에서 곧 새벽 역시 발견할 것이므로 하나님이 행동해야만 했다. 이 신적 활동의 기반은 세례 요한이 시작한 대체적인 성전 공동체가 될 터였다.

_제1장 “누가 너희에게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이 반응의 성격을 특정할 때 우리는 그것에 기본적으로 두 가지 측면이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첫째, 예수는 이전의 성전 반대 분파들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의 공식적인 지도자들에게 회개하라고 촉구했다. 만일 예수가 성전에 반대하는 그의 이전 시기 사람들이나 그의 추종자들이 내린 것과 유사한 결론에 도달했다면 그 문제에 있어 예수에게는 다른 대안이 없었을 것이다. 제2성전기의 신실한 유대인이 성전에 관한 자신의 염려를 혼자서만 간직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불합리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공개적으로나 절반쯤 공개적으로 성전에 반대하는 글을 썼다. 예수 역시 성전 지도자들에게 공개적으로 반하여 말할 도덕적 의무를 느꼈다.

둘째, 만일 예수가 이스라엘의 희망이 자신과 자신의 운동에 있는 것으로 보았다면 이 점은 이스라엘의 성전 활동을 확립된 통로 밖으로 옮겨 가는 것을 수반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의 마음을 선점한 관심사와 계획 외에 기도나 토라 연구 같은 별도의 성전 관습이 “부가물”이 되어야 했다는 뜻은 아니다. 대신 우리는 이제 예수의 성전 반대 신학이 이스라엘의 역사의 그 특정한 기로에서 자신의 역할과 그의 운동의 역할을 이해하는 근본적인 틀을 제공했다고 믿을 몇몇 이유를 가지게 되었다. 나는 동일한 이 틀이 그를 규정짓는 행동들을 알려주었다고 생각하며 그렇게 주장하려고 한다. 요컨대 나는 예수가 그의 추종자들에게 요구한 모든 관습이 본질적으로 성전 관습으로 여겨져야 한다고 제안한다. 예수를 이 “성전 맥락” 안에 위치시킴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예수가 한 일의 이유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_제2장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을 알지 못하느냐?”

 

나는 지금으로서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믿는다. 예수는 그날 성전에 들어갈 때 주로 두 가지에 관심이 있었다. 첫째, 그는 재무적 남용에 기초해서 현재의 성전 관리를 예언자적으로 기소했다. 둘째, 그는 종말론적 성전 (재)건축자로서의 자신의 역할을 나타냈다. 두 의제 항목 모두 현재와 미래에 대해서 말한다. 둘 모두 제의에 대한 우려에서뿐만 아니라 사회경제적·정치적 정의에 대한 관심에서 나왔다. 이런 주장은 이미 이전의 학자들에게서 전개되었고 나는 여기서 확실히 그들의 성과 위에 논의를 진행하고 있지만, 나의 최종 목표는 하나의 성전을 청소하고 또 다른 성전을 소개한 예수의 행동은 그의 좀 더 넓은 의제에서 빗나간 것이 아니라 밀접하게 연결된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더욱이 그 행동들은 예수의 성전으로서 자기 이해의 본질적인 측면이다.

우리가 회고적으로 예수의 사형 선고와 성전 정화를 연결해보면 우리는 그의 성전 행동이 절정의 행동이었음을 알게 된다. 장사꾼들과 환전상들을 몰아냄으로써 예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 셈이었다. “오늘날 너희가 보고 있는 이 성전은 탐욕스러운 관리자들로 말미암아 더럽혀졌다. 그러므로 나는 성경에 따라서 환난이 임박했고 성전이 파괴될 것이라고 선언한다. 나에 관해서는 환난의 ‘3일 후에’ 내가 새로운 성전, 즉 다른 성 전들과 달리 인간의 손으로 짓지 않은 성전을 지을 것이다.” 헤롯 성전의 파괴와 메시아가 자신의 운동과 궤를 같이하는 새로운 성전을 세우는 것이 가까이 임했다고 선언함으로써 예수는 본질적으로 오랫동안 기다려 왔던 종말론적 사건을 단호하게 현재의 실존적 위기로 재구성했다. 한편으로 [그렇지 않다는] 예수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성전 관리인들의 나무랄 데 없는 정당성을 믿은 사람들은 예수의 메시지가 체제 전복적이고 심지어 매우 위험하다는 데 동의해야 했을 것이다. 만일 예수가 틀렸다면 그는 참으로 틀렸다. 다른 한편으로 만일 예수가 옳았다면 이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의 운동, 즉 예수가 다니엘서의 “나라”와 동일시했고 사실상 줄곧 선포해온 운동에 보조를 맞출 것을 요구할 것이다. 만일 예수가 옳았다면 그는 참으로 옳았다. 이 점에서 성전에서의 예수의 행동은 그가 자기 주장의 정당성 또는 부당성에 관해 “마무리 짓는” 방식이었다.

_제3장 “이 성전을 헐라!”

 

물론 예수 앞에 있던 그 사람이 이 점을 어느 정도로 이해했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만일 그가 이해했다면 그는 예수의 요구에 상당히 많은 것이 걸려 있음을 인식했을 것이다. 상류 사회에서 나오라는 요구와 하류 사회로 들어가라는 요구는 별개였다. 사람이 자신의 친족 집단을 통해 규정되는 한(그리고 고대에는 확실히 이 역학 관계가 작동했다), 이 요구는 본질적으로 가난해지는 것을 의미했다. 그 사람에게는 매우 당황스럽게도 예수는 두 가지 모두를 무조건적으로 요구했다. 사회·경제적 힘의 재분배라는 예수의 목적은 가난한 사람들을 낭만적으로 고상하게 만드는 것이나 소박성 자체를 위한 소박성을 치하하는 것과는 거의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실제적인 차원에서 그의 추종자들은 스스로를 남에게 의존하는 가난한 사람들과 동일시할 뿐만 아니라(이는 그들의 제사장적인 지위를 나타냈다) 맘몬에 의해 견인되는 사회 구조를 피하려고 했다(이는 야웨의 제사장들에게 요구되는 일편단심의 헌신을 나타냈다). 복구할 수 있는 역사적 데이터에 비추어 볼 때 예수와 그의 운동은 이것을 옹호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우리가 마가복음 10:17-22에서 만나는 사람이 최종적으로 수용할 수 없었던 내용으로 보인다. 혹자가 예수의 종말론적 성전에 참여하는 것이 지금 그 성전의 철저한 요구에 기꺼이 동조하는 것에 의존했다면 그 사람은 더 좋은 제의가 그를 기다리고 있다고 추론했어야 했다.

베다니에서 예수께 기름을 부은 여성의 기사는 예수 운동이 사회적으로 급진적인 것이었다는 점뿐만 아니라 여러 면에서 그 운동의 몇 가지 상황도 밝혀준다. 첫째, 그 사건은 예수 운동이 가난한 사람들의 필요를 충족시켜주는 일종의 물품 공급소였다는 사실에 대한 훌륭한 증거를 제공하며 이 점에서 마가복음 10:17-22(젊은 부자)의 증거로부터 도출된 첫 인상을 확인해준다. 둘째, 그 문맥에서 예수가 신명기 15장을 인유했다는 점에 비추어 우리는 가난한 사람에 대한 이러한 관심을 빚을 면제해 줄 성서의 의무를 이행하려는 노력의 일환과 동일시하는 것에 대한 확고한 근거를 갖게 된다. 이 점은 나아가 종말론적 희년이라는 좀 더 넓은 배경에 비추어 이해되어야 한다.

자신의 운동의 희년적인 성격을 상징적으로 전달하고 같은 원칙을 실제적으로 나타냄으로써 예수는 야웨를 예배하기 위한 땅과 사람을 회복하고자 했다. 결코 이집트나 아시리아로부터의 해방 자체가 목적으로 여겨지지 않았듯이 희년 역시 그것 자체가 목적은 아니었다. 땅의 재분배와 채무 면제의 주된 요점은 하나님의 성전이 중단된 지점에서 그것이 곧 회복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유배 기간의 정점에 맞이하게 되는 열 번째 희년인 이번에는 이스라엘이 그들의 성전이 완전히 새로운 모습을 띠고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메시아를 통해서 그곳의 보물이 썩거나 없어지지 않을 성전을 짓고 있었다. 예수의 동시대인들에 대한 깜짝 놀랄 뉴스는 그 성전 건축이 현재 일어나고 있다는 그의 주장에 놓여 있었다.

_제4장 “우리의 빚을 면제하여 주소서”

 

성전은 창조와 재창조의 힘의 현장으로 이해되었기 때문에 고대 유대교에서 제의 공간과 치유 사이의 연결이 특히 강하게 드러난다. 신체의 치유가 재창조의 한 형태가 아니라면 무엇이었겠는가? 2차 문헌에서 방대하게 입증되는, 유대교의 성전과 창조 개념 사이의 중복을 언급했으니 나는 이 점에 대해서는 장황하게 언급하지 않을 것이다. 성전 건축은 어떤 의미에서는 창조였기 때문에 성전이 건축되었을 때 성전이 창조의 소우주로 설계되었다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물 두멍, 제단, 성전 휘장─성전 구역의 주요 고정물들─은 모두 우주의 구성 요소들을 상징했다. 그것들은 각각 바다와 땅과 하늘에 해당했다. 지성소 안에 신비롭게 감추인 궤는 하나님의 발판이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궤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하나님은 역설적으로 위에 있는 하늘 성전에서 그의 보좌에 앉지만 성전의 내소에서 창조세계에 거주하고 그것을 유지하며 다스린다. 시온의 거주자로서의 야웨께 기도할 때 유대인 간구자들은 본질적으로 빛과 생명 그리고 존재하는 모든 것의 창조자께 창조의 대본을 바꿔 달라고 요청하는 셈이었다. 신적 치유에 관해서는 (그리고 모든 치유는 궁극적으로 신의 대리인을 통해 발생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성전보다 그런 치료를 모색하기에 좋은 장소가 없었다.

이는 예수가 명백히 그 당시의 정결법을 위반했고, 다른 유대인들이라면 그 묘지에서의 접촉으로 말미암아 부정해졌다고 여겼을 그 사건에서 무사했다는 사실과 모종의 관계가 있을 것이다. 이 일화 및 다른 일화에서 제시된 예수가 어떻게 정결한 상태를 유지했는지에 관해 학자들이 열띤 논쟁을 벌이고 있으며 이에 관해 다양한 주장이 제기되었다. 지금까지 내가 주장해온 내용에 비추어 볼 때 예수가 제의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과 축귀 기법을 사용하지 않은 것 모두에 대한 그럴 법한 설명이 등장한다. 유대교에서 오염은 일반적으로 원심적으로 이동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즉 부정함의 흐름은 밖을 향해 이동해서 그것과 접촉한 깨끗한 객체를 오염시키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이에 대한 유일한 예외는 제단이었는데, 하나님의 현존으로서 제단은 부정한 것을 정결케 변화시켰다. 아마도 예수가 마가복음 5:1-20에서 자신의 부정한 환경에 괘념치 않은 것은 그가 정결법을 무시했다는 증거가 아니라 그가 그 법들이 종말론적인 순간에 따라 재정의되었다고 확신했다는 증거일 것이다. 만일 예수가 자신이 성전이라고 확신했다면 그는 아마도─그 시대의 다른 성전 반대 집단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던 방식으로─자기가 단순히 신적인 힘의 매개자가 아니라 바로 지상에서 그 힘이 나타나는 장소라고 추론했을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예수의 축귀 관행의 장소와 방법이 자신이 구현된 종말론적 성전이라는 자의식에 돌려질 수 있지 않겠는가? 나는 현재로서는 잠정적으로 이 가설을 유지한다. 이에 관한 확증이 나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예수 전통은 자기들의 주인공이 다음과 같은 사람들과 관련된 대규모 식사를 시행한 것으로 묘사한다는 점이 확실해 보인다. (1) 예수가 끌어들이려고 했던 사회·경제적 특성에 부합하는 사람들, 즉 “가난한” 사 람들, (2) “정결한”(kashrut) 식사에서 일반적으로 전제된 정결 수준을 유지하지 못한 사람, (3) 적어도 한 번은(비록 그것이 한 번에 그쳤을지라도) 상당한 수의 이방인이 포함됨. 대다수 학자들이 논박할 수 없다고 여기는 사실, 즉 예수가 좀 더 사적인 식사 자리에서 개의치 않고 가난한 사람들 및 제의상으로 불결한 사람들을 포함한 “죄인들”과 어울렸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군중의 구성에 대한 이러한 재구성은 잘 확증된다. 예수가 이방인들과 식사했다는 증거는 없지만 그와 함께 식사한 몇몇 식탁 동료의 정결 상태로 미루어 볼 때 아무튼 그들은 “이방인” 범주와 별로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확실히 예수가 가난한 사람들과 나눈 사적인 식사는 대규모로 먹인 사건에 대한 소규모의 예기(豫期) 또는 재연이었다. 예수의 식사 습관의 두드러진 특징─그리고 그의 대적들이 그에게 제기한 주요 비판들 중 하나─은 그가 교류한 사람들이었다. 그의 과실은 그가 가난한 사람들, 제의상으로 불결한 사람들 그리고 적어도 한 번은 이방인들과도 교제했다는 사실이었다. 놀랍게도 그는 정결이나 불결에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서 이렇게 했다.

_제5장 “주의 나라가 임하소서!”

 

그 사이에 우리는 우리가 시작했던 곳, 즉 바울과 그가 예수를 “머릿돌”로 부르는 곳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그 어구가 자의적으로 채택된 비교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린다. 오히려 바울 사도의 성전 이미지는 그것에게 매우 중요한 세상을 통합한다. 그것은 예수나 바울의 시대 훨씬 이전에 기원을 두고 있을 뿐만 아니라 결정되지 않은 어느 시점에 절정에 이를 세상이었다. 성전 예수에 관한 초기 그리스도인의 언어는 이스라엘이 소망하고 고대했던 모든 것, 하나님의 백성(그렇게 확고하게 믿어졌다)이 장차 어느 날 보게 될 모든 것을 함께 모은 것에 대해 말하는 방식이었다. 그것은 또한 오늘날 탐구될 세상이기도 하다. 역사적 예수가 성전 상을 뒤엎었을 때 그는 사실상 그 나라가 왔고 그 결과 인간의 실존의 요체인 예배가 이제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가능해지려 하고 있다고 선언했다. 이 새로운 방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관해 우리는 아직 완전히 이해하거나 경험하지 못했다.

_결론 새로운 몇 가지 정리 및 새로운 몇몇 이슈 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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