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 『내 인생의 36.5도』 출간안내

새물결플러스
2020-11-27
조회수 1641

책소개

『상식이 통하는 목사』를 통해서는 지성을, 『지렁이의 기도』를 통해서는 영성을 회복할 것을 한국교회에 제안해 큰 호평을 받았던 김요한 목사가 신작 『내 인생의 36.5도』를 출간했다. 인간의 체온을 상징하는 숫자, 36.5도를 제목에 넣은 것은 글을 통해 어떤 온도를 느꼈으면 하는 이유에서였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에는 웃고 울고 사랑하고 분노하며 살아가는 한 인간의 ‘온도’가 녹아 있다. 기독 공동체 안에서 가장 열심히 읽고 쓰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저자가 지난 9년간 페이스북에 올린 많은 글 중 사람 사는 이야기와 개인적인 이야기 일부를 추리고, 기억나는 일화를 중심으로 새로 쓴 글을 묶었다. 목사가 된 사연과 함께 군목 시절 겪은 웃픈 이야기와 목회 시절 만났던 성도들과의 이야기, 신학 전문도서 출판사를 운영하면서 겪은 애달픈 이야기들이 주를 이룬다.

본문은 견고한 교회 예배당 안에서 맵시 나는 차림새로만 살아서는 결코 알 수 없는 성도들의 땀내 나는 엿새 동안의 삶을 엿보기도 하고, 저자가 30년 가까이 지켜온 주일성수 개념을 내려놓게 된 계기도 들려준다. 누가 봐도 절대 거듭나지 않을 것 같았던 사람이 거듭나는 이야기도 있다. 자신만의 신념과 견고한 선입견 안에만 갇혀 있으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이의 삶을 나누고, 무엇보다 고집불통의 유일신 믿음이 아닌 상식이 통하는 신앙 이야기를 들려준다. 인간의 아픔과 고난을 지나치는 하나님이 아니라 누구보다 마음 아파하며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을 아는 저자의 믿음은 그 하나님의 시선에 가 닿으려고 애쓴다. 가독성 높은 저자의 글솜씨는 글 한 편 한 편을 단숨에 읽게 해주고, 저자가 직접 경험한 그리스도인들의 온기와 냉기가 가득한 이야기들은 웃음과 눈물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는 종교인들로 인해 기독교에 반감을 갖기에 이른 독자들에게나, 반기독교적인 사회 분위기에도 여전히 자신의 믿음을 수호하고자 분투하는 그리스도인 독자들에게 이 책은 가볍지만 묵직한 감동을 선사할 것이다. 무엇보다 저자 자신이 1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개신교를 떠나고 싶은’ 갈등에 시달리면서도 여전히 그 안에 남아 있는 고민을 엿봄으로써 동일한 문제로 힘들어하고 아파하는 사람들에게 동병상련의 마음을 공유하게 할 것이다. 인간의 ‘온기’를 지닌 종교를 갈구하는 이들에게, 저자의 치열하면서도 인간적인 경험들이 따뜻하게 전달되리라 본다.




지은이 소개

지은이 | 김요한

과거에는 건강한 교회를 일구는 것을 소명으로 알고 목회에 전념하였으며, 현재는 새물결플러스와 새물결아카데미 대표로 섬기면서 출판과 아카데미 운동을 통해 건전한 지성을 보급하는 것을 소소한 보람으로 여기며 살고 있다. 미래에는 가난한 자와 아픈 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봉사하며 환대의 삶을 사는 것이 목표다. 지은 책으로는 『군대간 형제에게 축복송』(규장), 『상식이 통하는 목사』, 『지렁이의 기도』, 『코로나19 시대의 메모』(이상 새물결플러스)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는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무신론의 심리학』(이상 새물결플러스) 등이 있다.




차례

글을 시작하며


목사가 된 사연/ 아버지의 비뚤어진 치아/

미안하다고 말하는 신/ 체온 없는 신학이 무슨 소용인가?/

스승들과의 만남/ 카메라를 처음 손에 쥐다/

드럽게 힘드네/ 급정차 순간에 그가 보인 첫 반응/

가장 짧았던 설교/ 깜짝 놀랐던 가정 심방/

교통사고 후유증/ 주일성수의 포기(?)/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보여준 행동/ 철원에서 온 집사님/

제게 맡겨주십시오/ 교회로 숨어든 병사/

전세금에 대한 뼈아픈 추억/ 공부 안 하면 저런 데서 산다/

용기/ 용서를 구하다/

라이카 카메라/ 고생과 수고가 다 지난 후/

주중에는 교회 오지 마시오/ 힘들 텐데, 그래도 하겠니?/

아, 행복하다/ 말씀의 주인과 함께 계시다/

제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비염에서 해방되다/

광야에서 꽃 한 송이를 심는 사람들/ 저희 부부가 제일 놀랐어요/

핸드드립 수업/ 이런 커피는 드릴 수 없습니다/

친구란?/ 목회 성공/

노점상의 배려/ 목사의 소명이 없는 듯합니다/

당신 좌파였어?/ 그 기도 제가 이루어드리지요/

아버지의 마음/ 어떤 후원자/

덕분에 나도 숟가락을 하나 얹다/ 칼자국/

반려묘를 위한 기도/ 체급이 다른 사람과는 다투지 않는 법이란다/

아이의 리듬에 맞추는 법을 연습하다/ 중환자실 앞에서/

우리가 눈물을 흘리는 까닭은/ 카페 매니저님이 세례를 받다/

어느 결혼식


글을 마무리하며




본문 중에서

그날 나는 세상에서 엿새를 살아가는 교인들의 삶에 대해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목사인 나는 일주일 내내 예배당 안에서 맵시 나는 옷을 입고 교양 있는 언어를 구사하며 교인들을 향해 ‘그리스도인의 향기’ 운운하지만 정작 교인들은 때 묻고 냄새나는 옷을 입고서 땀범벅이 되어, 그리고 시시때때로 “드럽게 힘드네, 씨X” 같은 신음을 뱉어가며 겨우겨우 사는구나 싶었다. 그리고 그 처절한 삶의 현장을 모른 채 온갖 화려한 말발로 치장한 나의 종교 언어들이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그날 나는, 비록 일주일 내내 땀에 찌든 옷을 걸친 채 입에는 욕지거리를 달고 이 길 저 길 누비면서도 주일이면 가장 깨끗한 옷을 차려입고 예배당을 찾는 그 아주머니가 누구보다 귀하게 느껴졌다.

_44-45쪽에서


고민 끝에 나는 30년 가까이 지켜온 주일성수 개념을 내려놓기로 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란 뜻에서 말이다. 그리고 매주 주일이면 예배 후 남성 교우들과 함께 부대 근방의 맛집을 다니면서 친교에 힘썼다. 그 결과 많은 남성 간부 신자들이 교회 활동에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요즘은 이따금 어린 시절에 철저하게 지켰던 주일성수 모습이 아련하게 그리워질 때가 있다. 하지만 예전으로 돌아가기에는 한국 사회와 교회의 문화가 너무 많이 달라진 것이 사실이다. 다만 자신의 쾌락과 복지를 위해서는 주일에 되도록 돈을 안 쓰고, 다른 사람의 기쁨과 유익을 위해서는 아낌없이 쓸 수 있도록 방향을 잡아가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_66쪽에서


“목사님, 제가 요새 새벽기도회에 나와 울면서 기도를 드리는 것은 제 몸이 아파서 그러는 게 아닙니다. 목사님도 잘 알다시피 제가 젊은 날 월남에 가서 조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싸운 것에 대해 평생토록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살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교회에 다니며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듣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아, 내가 젊은 날 애국과 이념을 빙자해서 사람을 죽인 죄인이구나’ 싶은 깨달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양심에 가책이 되어 견딜 수가 없어 매일 새벽마다 하나님께 회개하는 중입니다. 그런데 일단 한 번 회개를 시작하니 그 외에도 어찌나 회개할 것이 많이 생각나는지 도저히 눈물을 멈출 수가 없습니다.”

_130쪽에서


사랑에는 국경도, 인종도, 종교 간의 장벽도 없다. 세월이 흐르면서 나는 그 사실을 또렷이 알아가고 있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를 위해서 시간과 에너지를 쏟는 것은 반드시 그가 기독교인이어서가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사랑을 받아야 할 사람이 누구든 간에, 그가 이슬람교인이든, 불교도든, 무신론자든, 성소수자든 관계없이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라고 하셨기 때문에 그를 사랑하는 것이다. 나는 어제보다 오늘, 그리고 오늘보다 내일 더 많이 사랑하고 싶다. 내 사랑이 하루에 1밀리미터씩이라도 커졌으면 좋겠다. 우리 모두가 서로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그래서 많은 사람의 눈물보가 터져 그 눈물들이 모여 세상을 살리는 강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날 때 우리의 눈물샘은 마치 구약성경 에스겔 47장에 나오는 성전의 생명샘과 같아지리라.

_219-220쪽에서

 

그런데도 왜 나는 아직도 한국 개신교를 못 떠나고 있는 것일까? 무엇이 나를 주저하게 만드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알것 같으면서도 잘 모르겠다. 다만 내가 세찬 바람 앞의 갈대처럼 흔들리면서도 계속 제자리에 서 있는 이유는, 그저 내 주변에 마음이 ‘따뜻한’ 그리스도인들이 있기 때문이라고만 말해두자. 사람을 통해 받는 상처들을 사람을 통해 위로받고 있기 때문이라고만 말해두자. 결국 인간의 ‘온기’를 지닌 그리스도인만이 우리의 희망이라고만 말해두자.

_242-243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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